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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짐 Nov 15. 2018

피 한 모금

2009, 7

  2009년 7월 26일 새벽 두 시께 우리는 소집되었다, 정확히 이틀 만에.

  낡 아줌마의 죽음과 비교해 상황이 더 나빴다. 이런 말 송구하지만 낡의 죽음은 모두가 예견하고 있었다. 태생이 불분명한 데다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었다. 게다가 왕성한 식욕에 비해 행동이 굼떠서 장마철을 버틴 것만도 신의 축복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셰라면 얘기가 다르다. 셰는 젊고 용맹하다. 몸놀림 또한 어찌 그리 날렵한지 거센 장대비 사이를 속주하는 것쯤 일도 아니었다. 성품도 너그러워 암컷들의 지도자로 벌써부터 낙점이 될 정도였다. 그런 셰가 지금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해체되어 있는 것이다.

  조금 전만 해도 윤기 나게 빛났을 투명한 날개와 모두의 부러움을 샀던 앙증맞은 더듬이와 그리고 또……. 

  아아 바보 같이 눈물이. 이제 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와 클 형, 어린 드므는 사망한 지 막 십분 남짓한 셰의 시신 앞에 망연히 서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지키고 서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우리는 계속 살아야 하고 셰를 잊어야 한다.


   저놈이다. 셰를 이렇게까지 만든 놈. 사내 주제에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노랗게 물들이고 껌을 좍좍 씹으면서 이쪽으로 걸어온다. 질겅질겅 껌을 씹을 때마다 셰에게 물려 붉게 부푼 피부와 함께 둥그렇게 처진 볼살이 씰룩거린다. 불량해 보이는 생김새가 아무렇지 않게 살생을 감행하기에 적격으로 보인다. 잔인한 놈.

  드므가 무모하게 놈에게 튀어나가려는 것을 클이 가까스로 막았다. 셰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한 드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럴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드므의 목격에 따르면, 우리에게 신선한 피 한 모금을 제공하기 위해 대상을 물색하던 셰가 저자를 발견했다. 물기 좋은 살집과 남보다 높은 체온은 놈의 몸에서 열을 생성하고 땀을 배출했다. 놈의 젖산 냄새는 20미터 밖에서도 감지될 정도였다. 표적으로 삼자마자 셰는 신속하게 달려들어 놈의 왼쪽 허벅지를 오차 없이 공격했다. 만족스러운 식사가 될 터였다. 셰의 지시에 따라 드므도 놈 쪽으로 조심스레 날아갔다. 드므가 굶주린 배를 채울 동안 셰가 상대의 주의를 혼란시키고 후에 나와 클을 불러들일 계획이었다.

  드므는 놈의 주위를 몇 바퀴 돌았다. 놈은 소름 끼치도록 쟁쟁거리는 헤비메탈 음악에 취해 시종일관 육중한 다리 한쪽을 건들거리고 있었는데 그 진동이 온몸으로 퍼졌다. 조심스럽게 착지하기가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셰가 뒤로 바짝 붙었으나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은 드므는 셰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셰는 한발 물러나 드므의 성공적인 착지를 지켜보기로 했다.

  드디어 드므가 착지했다. 그런데 욕심이 과했다. 마우스를 까딱거리는 놈의 손등 위에 떡하니 앉다니 그야말로 모험인 것이다. 스릴 넘치는 모험은 한순간의 위험으로 번질 수 있다는 선조들의 가르침을 너무 쉽게 간과한 드므였다. 퉁퉁한 손등을 찔러볼 틈도 없이 드므의 존재는 발각되었다. 놈의 왼손바닥은 천천히 자신의 오른손등을 향해 조준되고 있었다.

  셰가 끼어들어 재빨리 놈의 눈두덩이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드므는 그대로 손등 위의 화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놈의 처리 대상은 자연스럽게 드므에서 셰에게로 옮겨갔다.

  그러나 앞서 조금 언급한 바, 셰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담력과 빠른 몸놀림을 타고났다. 두툼한 파리채 같은 놈의 휘둘림을 피해 이마 앞에서 등 뒤로, 등 뒤에서 옆구리 사이로 셰는 웽웽 날았다. 셰는 놀리듯 녀석을 도발하고 있었다. 열을 내어 지치게 할 심산인 것이다. 멀찍이 대피한 드므는 셰의 도발을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놈의 손가락 어딘가에 셰의 몸체가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일순 휘청하고 만 것이다. 놈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중심을 잃은 셰와, 부아가 치밀대로 치민 놈의 전세는 단번에 역전되었다. 놈은 커다란 손으로 셰를 확 낚아챘다. 드므는 소스라치게 놀랐을 뿐 선뜻 셰를 향해 나아갈 수 없었다. 대신 방향을 틀어 우리 형제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숨 가쁘게 도착했을 때 셰는,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이미 처참하게 해체된 시체가 되어있었다.

  

  셰를 바로 앞에 두고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놈이 웃고 있다.

  우리 셋은 더듬이를 맞대었다. 뾰족한 대안은 없다. 셰뿐만 아니라 누가 됐든 죽음은 죽음으로서 끝이다.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저자에게 내릴 수 있는 유일한 형벌은 놈의 몸속에 흐르는 피 한 모금을 취하여 더 많이 번식하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나와 드므는 그나마 연장자인 클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놈은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시시덕거리고 있다. 제대로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듯했다. 클은 잠시 고민하더니 한꺼번에 놈의 윗입술에 침을 찔러 넣자고 제안했다. 그럴듯한 작전이었다.

  뜻을 모은 우리는 누가 선두랄 것도 없이 놈에게로 돌격했다. 그러나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는 인간들의 말을 이럴 때 써먹게 될 줄은!

  놈이 보고 웃는 것은 다름 아닌 셰의 사망 전 동영상임을, 복수의 날갯짓을 시작한 우리들은 보고 말았다.

  드므가 현장에서 본 것은 셰의 마지막 모습이 아니었다. 드므가 구조요청을 위해 자리를 비웠을 당시만 해도 셰의 숨은 붙어 있었음이 영상을 통해 명백히 확인되었다.

  놈은 낚아챈 손아귀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셰의 날개를 거침없이 떼어내고 격자무늬 종이 중앙에 올려놓았다. 적색 색연필을 쥔 놈의 손이 화면에 나타난다. 놈은 커터칼로 심지 끝을 정교하게 다듬는다. 심지 부스러기가 셰의 몸 주변으로 흩어진다. 이제 놈은, 간신히 바둥거리는 셰의 몸을 심 끝으로 툭툭 친다. 그러고는 이쪽저쪽 데굴데굴 굴리고 있다. 몇 번이나 그런 짓을 반복하다가 끝내는 셰의 명치에 날카로운 심지를 팡팡 찍어 내렸다. 잘게 부서진 심지가 사방으로 튀었다.

  

  셰의 최후가 고스란히 촬영된 영상을 보면서, 그걸 보고 자지러지는 놈을 보면서, 우리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짜부라져 즉사하는 것은 우리 종족 사이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죽음이다. 그러나 생포된 것도 모자라 이른바 애완 모기가 되어……. 아아 제발, 이런 식의 수모는 견디기 힘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누구도 놈에게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언제나 인간들은 자기네들 생명만 귀히 여기고 우리처럼 작고 하찮다 여겨지는 미물의 생명을 가지고는 포악한 장난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 종족들의 피로 배를 채우고 자손을 증식시킨다는 사실이 못내 씁쓸하다. 그저 우리는 오늘의 피 한 모금을 사양하는 데 그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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