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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슴또치 Oct 13. 2022

기사단장 죽이기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Review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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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에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묘사에 매우 탁월해서 그가 그리는 장면이 쉬이 눈앞에 그려지고, 주인공이 생각에 잠길 때 그 무게감에 나도 침착해졌다가, 긴장을 자아내는 상황에서는 나도 모르게 오싹해서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 마치 내게 '이렇게까지 내가 표현해 주겠다는데 빨리 다음 페이지로 안 넘길래?'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그렇기에 오래 시간을 두고 읽었다. 의도적으로 챕터들마다 쉬어주면서 내 감정을 정리하며 넘어가게 한 가슴 두근거리는 책은 소설 장르에선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1

상처받고 응어리진 사람들의 이야기


『기사단장 죽이기』의 장르는 일상 판타지라 볼 수 있다. 어느 날 그림 속 기사단장이 나타나 말을 거니 그야말로 판타지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의 핵심은 기사단장의 출현이 아니라 그 밖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 있다. 아내에게 일방적인 이혼 통보를 받은 주인공 '나',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만 이십 년 전 이별한 여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딸로 추정되는 아이 곁을 맴도는 '멘시키 와타루', 어렸을 때 엄마를 잃고 마음과 감정을 닫아 버린 '아키가와 마리에', 그리고 전쟁으로 연인과 가족을 잃고 슬픔과 분노를 혼에 담아 그린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려낸 '아미타 도모히코'.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지만 곪아있는 그들의 마음이 메인 소재이다. 기사단장이나 이데아, 메타포 같은 존재들은 이를 드러내 주는 수단일 뿐이다. 서로 관계없던 사람들이 주인공의 그림, 그리고 <기사단장 죽이기>를 통해 얽히고, 자신의 감정에 무뎌진 사람들이 절벽 끝에서 대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

이 책이 재미있는 점 중 하나는 그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이 그림인 것이다. 주인공의 직업은 화가, 특히나 사람의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이다. 그는 사람의 표정 뒤에 숨겨져 있는 본질을 찾아 화폭에 담는다. 그만큼 이 소설의 내용의 많은 부분이 '나'의 초상화 그리는 장면들로 채워진다. 화가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다 보니 그가 인물을 보는 방식, 인물들에게서 보이는 무언가가 자주 등장한다. 이런 분석적인 시각은 자신에게도 적용되는데, 자신의 트라우마들:아내의 외도와 이혼 통보, 여행 도중 마주친 섬뜩한 남자, 극심한 폐소 공포증, 그리고 어렸을 적 죽은 여동생에 기억들로 자주 생각의 흐름이 이어지는 걸 볼 수 있다. 이 불안의 씨앗들은 그의 무의식 속에 있기에 그림을 그리다 보면 저 요소들의 영향을 받는다.


'나'의 집의 원래 주인인 '아마타 도모히코' 또한 화가다. 그에게도 트라우마가 있다. 빈 유학 시절, 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며 연인이 죽고, 본인도 고문당하다 송환되었다. 그의 남동생은 중일 전쟁에 징집되었다가 PTSD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그가 느낀 전쟁에 대한 환멸, 분노, 슬픔 등의 감정들을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 한 장에 녹여낸 것이다. 그의 감정의 씨앗은 천장 위에 숨겨져 있다 '나'에게 발견되며 새로운 감정적 연쇄 반응을 이끌어낸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았지만 그림이라는 언어로 서로 대화하는 것이다.


이 대화는 소설 후반부로 가면서 급속도로 전개되다 급기야 좁디좁은 동굴에 주인공이 갇히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실제인지 환상인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나'는 패닉에 빠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장소를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자신의 트라우마의 근원인 여동생이었다. 그래서일까 동굴을 빠져나간 이후의 주인공은 이전과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자신의 내면으로의 여로 끝에서야 자신의 감정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3

일본 소설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어쩌면 일본 문학을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편견에 의해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전반적으로 잔잔하면서 울림이 있다. 오늘도 좋은 책 하나 읽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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