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과 표준치료가 끝난 뒤 1여 년이 지났다.
오랜만에 재활의학과에 갔더니 동명이인이 있다며 진료카드번호를 물어보는데
‘78.....’ 앗! 순간 기억나지 않는다. 이럴 수가 나의 진료카드번호를 까먹다니 우째 이런 일이!!
병원에 오래 입원하거나 진료를 수시로 받게 되면 이름 대신 진료카드 번호가 더 익숙해진다.
수술하는 동안에 번호가 쓰인 종이 팔찌를 늘 차고 있고,
항암 때는 간호사들이 혹여나 약이 바뀔까 봐 정말 지겹게도 물어봤다.
처음 진료카드를 받은 날엔 낯설고 긴 그 일곱 자리 숫자가 그렇게 외워지지 않더니..
누군가 옆구리를 툭 치면 입에서 바로 ‘78....’이라고 나올 판이다.
수술과 항암 등 표준치료를 다 받고 나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보통 추적 관찰을 위해 혈액종양내과, 유방외과, 성형외과를 정기적으로 다녀야 하고,
내 경우엔 림프절 예방을 위해 재활의학과에, 항암의 후유증 때문에 산부인과와 안과,
정기검진을 통해 새롭게 나타난 종양 때문에 소화기내과, 내분비내과까지 한동안 줄기차게 다녀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항암이 다 끝났어도 짧게는 2주, 길게는 한 달의 간격을 두고 병원을 가야 했다.
물론, 어떤 때는 같은 날에 2개 과 진료를 보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내 진료카드번호는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다. 마치 머리에 새겨져 있는 것처럼....
그런데... 내 진료카드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다니..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온다.
늘 지갑에 넣고 다녔던 진료카드도 이제는 빼서 다른 곳에 놓아두었다.
진료카드처럼 내 곁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과 힘듬의 시간도 조금씩 옅어지고 있다.
긴 터널을 지나왔구나. 시간이 가긴 가구나.. 새삼 실감하게 됐다.
그래.. 힘든 시간은 영원히 계속되지도 않고, 나에게 찾아온 불행도 언젠가는 끝난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던 암흑 역시 끝이 있다. 물론, 이 시간들이 나의 최악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아직 생을 다 살지 않았기에 장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사람은 성장하나 보다. 암흑의 터널을 지날 때마다 성장하고, 또 성장하고..
성장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길이라면 그 길을 묵묵히 가주리라.
이젠 그만큼의 자신감도 생겼다. 나는 그 두렵다는 항암도 거뜬히 견뎌온 여자가 아니던가?
이제는 옛이야기를 하며 그때는 그렇게 절박했었지, 힘들었었지..
하지만 잘 견뎌왔다며 스스로를 대견해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