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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 사랑의 유효기간

by pdjohn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중경삼림>에서, 노란 가발과 레인코트를 입고 미친년 널 뛰듯 뛰어다니던 '임청하'의 대사다. <흐르는 강물처럼>에도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너무나 멋진 문장이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자에게 사랑의 감정이 들 때면, 어느새 머릿속에 떠오르며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주던 대사다.

개봉한 날로부터 무려 25년이 지난 시점에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도 설레기는 이전과 매 한 가지다. 여전히 난 중국어는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한다. 극 중 금성무가 만다린과 캔토니즈 그리고 일본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서커스에 가까운 능력을 보면서 그저 감탄을 할 뿐. 그 때나 지금이나 중국어가 미래엔 꼭 배워야 할 언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CF처럼 감각적인 영상과 시처럼 함축적인 구성에 열광하며, 왕가위식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던 그 시절. 영화잡지 '키노'의 정성일 칼럼을 오려서 스크랩해가며 <타락천사>와 <아비정전>을 탐독하던 청년은 이제 '넷플릭스'에서 입맛대로 콘텐츠를 찜하며 아이쇼핑을 하고 있다. 이젠 이렇게 긴강감 없는 옛날 영화 따위는 영화 웹하드에서 굿다운로더들에게나 관심을 받을까.

지극히 홍콩스러운 샌드위치 가게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라는 같은 장소를 두고 두 개의 에피소드가 자연스럽게 이어져있다. 평균보다 조금 덜 떨어진 듯한 두 명의 경찰, 금성무와 양조위(경찰 633)가 각자의 방법으로 실연의 아픔을 겪다가, 새로운 여자를 만나 사랑을 시작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경찰 금성무는 다시 보니 완전 사기캐다. 깎아놓은 듯한 외모에 소년 같은 표정이라니. 게다가 이별을 통보받고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해 자신의 생일(5월 1일)이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30일 동안 사모으고 이 통조림을 한꺼번에 먹어치우는 괴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이런 '미래소년 코난'틱한 설정 덕분에 오글거림 끝판왕의 명대사가 나올 수 있었다.

"나 혼자서 약속을 했다. 바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여자를 사랑하기로 했다."

발 냄새나게 뛰어다니던 마약 밀매상 임청하가 바에 들어오자 금성무는 호기롭게 접근해서 말도 안 되는 '뻐꾸기'를 날리고, 나름 얼굴이 열일했는지 간절함이 통했는지, 만취한 임청하는, '어디 가서 쉬고 싶다'며 금성무의 어깨에 쓰러진다.

여자가 '어디 가서 쉬고 싶다'라고 한다면 말 그대로 '쉰다'는 게 아닐 수도 있는데, 아쉽게도 백치미 만랩의 금성무는 쉬고 싶은 그녀를 호텔방 침대에 눕혀준다. 덕분에 26번째 생일날 아침, 삐삐로 울리는 임청하의 생일 축하를 메시지를 받는다. 다시 금성무는 영화와 광고 씬에 길이 남을 명대사를 남긴다.

"만약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의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왕페이와 양조위의 밀당이 녹아있는 '로코'의 전형을 가진다. 이어지는가 싶으면 어긋나고, 다시 서서히 만들어 가는 남녀의 인연이 설득력을 가지며 몰입을 하게 만든다.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양조위가 아파트에서 스튜어디스인 전 여자 친구(주가령)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다. 그나마 이 영화에선 유일한 베드 씬인데, 그 이유로 선정한 건 절대 아니다. 이 장면을 꼽은 이유는,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아쉬웠던 부분이었던, 헤어진 여자 친구를 그리워하는 주인공의 감정에 공감을 가질 만한 개연성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헤어진 그녀와의 기억에 대한 묘사가 없다 보니 금성무의 아픈 감정이 그저 장난처럼 여겨졌다면, 스튜어디스 제복을 걸친 전 여자 친구와 함께 한 시간에 대한 향수를 통해, 양조위가 느끼는 실연의 깊이감을 더해주고 그에 대한 페이소스를 강하게 불러일으킨다.

실연을 이기는 방법에 여러 가지가 있다. 이 영화처럼, 파인애플 통조림을 마구 먹어대거나, 인형과 대화를 하는 방법도 효과가 있겠지만, 결국 새로운 사랑을 통해 상실의 공간과 시간을 메꿔나가는 것이 방법일 듯싶다.

사랑을 할 때, 연료를 가득 채우고 이륙하는 비행기처럼 사랑이 오래갈 줄 안다. 하지만 언제나 비행은 취소되고 항로는 변경될 수 있다. 우리의 변덕은 희망에서 현실을 찢어놓는다. 정어리나 파인애플 통조림 같은 모든 물건엔 유통기한이 있어도, 내 사랑엔 유통기한이 없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는다.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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