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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 Sep 23. 2023

진주에 샹그릴라가 있다고?

   

진주에서 가장 오래된 초등학교가 있다. 중안초등학교다. 1895년 9월 경상우도소학교로 설립되어 1896년 1월 경상남도공립소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여 출발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이 학교가 우리나라 최초의 남녀공학 초등학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관련 자료에 따르면 중안초등학교는 1896년 당시 진주우편취급소 자리에 경상우도공립소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학생 20명으로 개교한 것이 시초이며, 1906년 9월 교명을 공립진주보통학교로 변경하였고, 같은 해 12월 교사를 매동(梅洞:지금의 인사동)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1909년 4월 1일 전국 최초로 3년제 여자학급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당시 한성(서울)에는 1886년 종교적인 목적으로 미국선교사가 세운 이화학당이란 사립여학교가 설립돼 있었고 진주에도 1906년 호주선교사가 설립한 정숙학교(시원여학교)라는 미션스쿨이 있었으나 대한제국정부가 세운 공립 초등학교에 설치된 여자학급은 없었다. 사실상 시원여학교의 전신인 사립정숙학교가 진주의 근대여성교육의 효시가 되었지만 남녀공학이 된 것은 공립진주보교보다 늦다. 정숙학교는 진주의 호주선교사가 세운 별개의 남학교인 안동학교와 1909년 8월 31일 통합해 사립광림학교라는 남녀공학으로 새롭게 출발했다.(이후 광림학교 여자학급은 시원여학교로 분리독립할 때까지 광림학교 여자부로 존속했다.) 그러나 공립진주보교의 경우 광림학교보다 5개월 전에 이미 여자학급을 설치해 우리나라 공립학교사상 최초로 남녀공학이 이뤄졌다’고 한다.      

‘경상남도공립소학교는 1911년 11월에 교명을 진주공립보통학교로 개칭하고 1919년에는 진주제일보통학교로 다시 개칭하였으며, 1938년에는 진주공립심상소학교, 1942년에 진주길야(吉野)국민학교로 부르다가 해방 후인 1946년 6월에 진주중안국민학교로, 다시 1996년에는 진주중안초등학교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2011년 3월 진주초등학교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초등학교가 봉래초등학교다. 1910년 7월 1일 4년제의 사립봉양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19년 5월 10일 진주제2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여 1942년 4월 30일 진주 봉래공립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1996년 3월 1일 봉래초등학교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경남도민일보 등에 의하면 ‘진주 봉래(蓬萊)초등학교 전신은 봉양(鳳陽)학교이며, 봉양학교의 전신은 양원(養元)야학교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1909년 2월에 조선 순종 황제의 공유재산을 활용해 각 지역에 학교를 설립하라는 칙령이 내렸고 그에 따라 교육 봉사자 김원로(혹은 김기수)는 대안면장 강재순(형평운동가 강상호의 부친) 등과 뜻을 모아 대안 1동에 사립 양원야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이때 대안동 동유답 220 두락을 활용했다. 처음 설립 후 5개월 만에 재정이 고갈되어 교문을 닫게 됐으나 강재순·강주식·강기석 등이 양원야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동민들과 모여 결의하고 2000여 원을 수합하는 역사를 이루었다. 이때 봉래동 인근에 사는 남평 문 씨 여성 독지가 한 명이 가장 많은 금전을 기부해 현재 진주성 비석군에서 찾아보면 선행비 2개가 있다. 1910년 3월 8일 자 지방신문에 의하면 양원-봉양-봉래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1912년에는 학생 82명, 설립자 강재순, 교장 서진욱으로 기록되었고 1915년에는 학생 88명, 설립자 강상호, 교장 김기태라는 기록이 있다.”라고 한다.     

“봉양학교는 진주지역의 대표성 있는 근대적 사립 초등계 교육기관으로 성장할 기반을 가졌으나 민족교육, 항일교육을 실시한다는 구실을 붙여 일제가 빼앗아 버렸다. 1919년 3월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봉양학교와 광림학교 출신들이 대거 지도자로 참여하고 같은 해 공립으로 변경되었다. 봉양학교는 8회 3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인재의 산실이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진주시 봉래동에는 형평운동과 3.18 진주 걸인·기생 독립단 만세운동과 연관되어 있는 봉래교회(현, 진주교회)도 있었다. 진주시 기록에 의하면 봉래동은 일제 강점기부터의 명칭이다. 구한말 진주군(晋州郡)시대에는 봉래동 지역에 중안면(中安面) 1동·2동, 대안면(大安面) 2동 지역이었다고 한다. 1914년 3월에 이들 지역 각 일부를 통합하여 진주면(晋州面) 비봉동 (飛鳳洞)이라 하였다가, 1932년에는 일본식 지명으로 봉래정(蓬萊町)이라 개칭되었고 1949년 8월에 봉래동이 되었다. 현재는 인구가 줄어들어 1997년 7월 1일 진주시 조례에 의하여 법정동인 수정동과 통합되어 행정동 명칭이 봉수동이 되었다.          

그런데 일인들이 왜 봉래(蓬萊)라는 명칭을 끌어들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봉래라는 명칭은 오랜 역사를 갖는 명칭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삼신산(三神山)은 한국에서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부르는 말이다. 이들 삼신산의 본래 명칭은 봉래산(蓬萊山, 금강산의 별칭) ·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의 별칭) · 영주산(瀛洲山, 한라산의 별칭)이다. 진시황과 한무제가 불로장생의 명약을 구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동남동녀 수천 명을 보냈다고 해서 더 유명해졌다. 이들 삼신산에는 신선이 살며 때때로 신의 이적(異蹟)이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렇게 삼신산이 우리나라에 있다고 믿는 것은 삼신재해동설(三神在海東說)이다.          

따라서 봉래라는 지명은 전국에 여러 곳에 있는데 부산의 영주동(瀛洲洞, 이 이름도 삼신의 하나인 영주에서 유래하였다)에도 봉래초등학교가 있다. 일본 위키백과에 따르면 일본에는 자신의 나라가 영주라고 주장하는 설이 있으며, 일본에는 방장과 영주만 있고 봉래는 떠내려가 버렸다는 설과 후지산과 연결 짓는 설이 있는데 ‘봉래’란 이상향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봉래’라는 지명이 진주에 있는 것이다. 진주의 풍부한 물산과 살기 좋고 아름다운 기후를 보고 아마도 유토피아나 상그릴라와 같은 상상 속의 이상향을 의미하는 뜻의 봉래를 붙인 것은 아니었을까?           

그 이상향이 있는 진주가 이제 활활 날아서 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고 밝은 등불이 되어 세상을 앞서가는 지표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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