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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 Sep 28. 2023

삼국통일의 기반이 된 3대 사찰이 진주시에 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경남 진주시에 용암사가 있는데 그 절은 ‘신라 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성모천왕(聖母天王)으로부터 비밀리에 부촉을 받고 삼국통일을 위해 선암(仙巖)·운암(雲巖)·용암(龍巖)의 3암사를 창건하였는데 이 절은 그중의 하나였다. 당시에는 국가의 비보사찰(裨補寺刹)로서 크게 사세를 떨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시대 박전지(朴全之)가 쓴 ‘영봉산용암사중창기(靈鳳山龍巖寺重創記)’와 고려학사 최자(崔滋 1186~1260)가 쓴 ‘만덕산백련사원묘국사비(萬德山白連社圓妙國師碑)’ 등의 기록에 의하면 풍수음양설의 대가인 신라말의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지리산 성모천왕으로부터 “3암사를 창건하면 삼한이 합쳐져 일국(一國)이 되고 자연히 전쟁이 종식되리라”하는 비기(秘記)를 은밀히 부촉받고 삼국통일을 위해 암(巖)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3개의 사찰을 세웠는데 그것이 진주 영봉산 용암사, 광양 백계산 운암사, 그리고 순천 조계산 선암사라는 것이다. (호남 쪽에서는 광양 운암사, 순천 선암사와 더불어 월출산 용암사를 호남의 3암사로 주장을 하기도 하나 이는 호남의 삼암사일 뿐 삼국통일의 근거가 된 삼암사로서는 문헌적 근거가 빈약하다)     

같은 자료에 의하면 ‘1314년(충숙왕 1)에는 무외국통(無畏國統)이 이 절로 옮겨와서 크게 중창하였으며, 다음 해인 1315년 충숙왕은 제찰사(提察使) 한중희(韓仲熙) 등에게 전지를 내려 절을 경영하게 하였고, 1316년 가을에는 제찰사 박효수(朴孝修)에게 절을 중창하게 함에 따라 1318년에 80여 칸을 새로 짓고 20여 칸을 중수하였다. 전당 안에는 닥나무 종이를 바르고 왕골을 깔았다고 하며, 금당(金堂)에는 석가여래상을 봉안하고,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상을 도금하였으며, 절에 대장경도 봉안하였다. 당시 염장별감 이백경(李白經)과 방우정(方于禎)은 왕명에 따라 설전지(雪牋紙) 3만여 장과 옻칠한 함상자 140여 개를 만들었으며, 무외의 제자 대선사 승숙(承淑)과 중덕 일생(日生) 등은 강화도 판당(板堂)에 가서 부족한 장경을 찍어 와서 신본(新本)과 구본(舊本)을 합하여 도합 600여함(函)을 만들어서 비단으로 잘 치장한 뒤에 새 전당에 봉안하였다. 같은 해 11월 18일에는 방우정이 다시 임금의 명을 받아서 7일 동안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성대하게 베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신도회장이었던 진종삼 회장이 불교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위와 같은 내용을 설명하면서 “1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3암사를 돌아보면, 선암사, 운암사는 아직도 절이 건재하고 있지만, ‘영봉산 용암사’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없다, 절터는 용암마을과 넓은 밭으로 변해 있다. 이는 마치 솥의 발이 하나 결손된 것과 같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삼암사 비보설’이 결손 되고 있다.”라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면서 ‘남북통일의 숙원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용암사를 중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설명을 좀 더 살펴보면 “현재 진주시 이반성면 영봉산(390m)에 있는 용암사지 현황을 살펴보면, 큰 절터는 형상변경 금지구역의 넓은 밭으로 되어 있다. 큰 절터에서 400m 떨어진 암자 터에는, ①보물 제372호 용암사지 승탑(부도), ②경남지방유형문화재 제4호 영암사지 석불좌상, ③비지정문화재 영암사지 비석 귀부 및 이수, 용암사지 석등 부재 용암사지 5층 망배탑 기단과 석재 등이 남아 있어 번창했던 용암사의 옛날을 말해주고 있다. 반면 귀중한 문화재가 있는 암자 터는 주변 환경이 불결하기 그지없고, 관리도 소홀함이 발견되고 있어 많은 분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라고 애처로운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때가 2016년인데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이 절터는 임진왜란 시 북관대첩(北關大捷)으로 유명한 정문부(鄭文孚1565~1624) 장군 후손들의 세거지가 되면서 해주 정씨 문중 소유가 되었있으며 암자 터에는 장덕재라는 재실이 건립되어 있다. 또한 진종삼 회장의 주장에 의하면 이 암자터 1931㎡(584평)의 지적도가 한반도 지도와 똑같은 모양이라고 해서 더욱 신기하다고 한다.      

이곳 용암사지에는 고려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경남지방유형문화재 제4호 영암사지 석불좌상)도 있는데, 석불좌상은 단칸의 전각에 봉안돼 있다. 조성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석불의 불두 부분은 지장보살의 모습을, 수인은 비로자나불의 지권인을 하고 있어 특이하며, 어깨까지 두건(頭巾)을 길게 내려쓴 불상의 얼굴 오른쪽 뺨 부분은 훼손됐지만, 전체적인 얼굴 윤곽은 타원형으로,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온화하다. 사각형의 대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데, 일반적인 불상에 비해 무릎이 약간 넓고 높다. 착의는 통견으로 법의를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였고, 가슴 앞부분을 넓게 파지 않는 인도식의 착의법을 따랐다. 옷 주름은 선으로 처리되어 몸매가 뚜렷이 드러나며, 목 부분의 옷깃은 두껍게 처리하였다. 하체는 무릎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마멸상태가 심한 편은 아니다.     

보물 제372호로 지정돼 있는 진주 용암사지 승탑(晉州 龍巖寺址 僧塔)은 원래는 용암사 터의 서북쪽에 파손된 채로 있었는데, 1962년에 원래의 위치로 옮겨 복원했다. 기단은 아랫돌 각 면에 구름무늬를 깊게 새기고 그 안에 불법을 수호하는 천부상(天部像)을 양각했는데, 그 수법이 우수하다. 연꽃무늬를 새긴 기단의 끝부분을 지나 탑신의 지붕으로 올라가면 얇은 지붕돌 밑에 똑같은 테두리의 평평한 받침이 눈에 띈다. 지붕선의 끝에는 꽃장식이 있다. 경사면은 완만하고 꼭대기에는 연꽃무늬가 얇은 띠로 둘러져 있다. 머리장식 부분은 석탑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구조물들이 차례로 올려져 있다.     

누구의 사리탑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전체적으로 비례가 잘 맞고 모든 부재가 8각으로 조성. 부도 주위에는 석등, 석탑의 부재가 함께 터를 지키고 있다.(석불과 승탑의 묘사 부분은 금강신문에서 발췌 인용)     

진주시 이반성면이 충절이 드높은 지역이라고 하면 진주에서 오래 사신 분들도 의아해하는 분들이 많다. 용암사를 모르니 충의사며, 성전암의 인조각에 대해서도 관심이 적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영봉산의 영험한 정기가 내려와 삼국통일의 기틀이 되고 이 나라가 전쟁 없는 세상이 되리라는 비기의 내용은 오늘은 희미하게 흩어진 머나먼 과거의 전설이 되었다. 작은 시내가 모여 흐르면 바다까지 흘러간다. 그러나 작은 시내가 모이지 못하면 땅으로 스며들고 증발해 버려 바다에 이르지 못한다. 더군다나 국내외 정세가 점차 일촉즉발의 위기로 다가가고 있어 더 안타깝다.

세상이 뭐라 하든 오늘도 영봉산의 정기가 계속해서 내려오는 모양이다. 진주에는 꾸준하게 인재가 나오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한 기운과 마음이 뭉쳐 용암사가 다시 큰 사찰로 거듭나서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고, 이 세상이 전쟁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을이 깊어지면 영봉산 기를 살펴볼 겸 용암사지를 거쳐 영봉산에 다시 한번 올라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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