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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 Oct 03. 2023

서부경남에도 독립기념관이 있다고?

 우리가 아는 독립기념관은 충남 천안시 목천읍에 있다. ‘일제강점기의 수난과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운 독립운동’이 주요 주제이며, 독립기념관의 상징인 ‘겨레의 탑’과 ‘불굴의 한국인 상’은 그대로 천안시의 랜드마크다. 또한 독립운동과 관련된 여러 사료와 전시물들이 기획, 순회, 상설 전시되고 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큰 파고였던 3.1 운동 당시의 기미독립선언문 작성에는 천도교, 불교, 기독교계 인사가 참여, 서명하였으나 여러 가지 일로 인해 유교(儒敎)계 인사가 참여하지 못했다. 이들 유교 인사들이 3.1 만세운동 이후에 따로 모여 독립운동을 지원할 방안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것과 이 회의의 기본 방침으로 미국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제시한 14개 조가 선택된다는 사실을 알고 이 기회를 활용하기로 했다. 윌슨은 “식민지 주권의 결정에서 주민들과 들어서게 될 정부 사이의 자결(self-determination)이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했고 이에 유림(儒林)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선언서’가 아닌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추진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파리장서(巴里長書)’다.           



파리장서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독립청원서’의 이름으로, 종이에 쓰고 나서 꼬아 짚신으로 엮어 숨긴 독립청원서를 몸에 지니고 1919년 3월 27일 중국 상해(上海)에 도착한 김창숙(金昌淑)이 이를 다시 풀어내 책으로 만들고, 그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어 있는 김규식에게 보내어 회의에 참석하는 각 국가의 대표들에게 제출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영문번역본과 국문번역본을 수천 부 인쇄하여 각국 대표와 공관, 국내 각 향교 등에 보냈다. 이것을 ‘파리장서사건’ 또는 ‘제1차 유림단사건’이라고 부른다. 결국 ‘파리장서사건’은 일제에 의해 발각되었고 국내에 있던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을 비롯한 유림들은 투옥되어서 옥고를 겪었다. 이러한 유림의 독립운동에는 서울을 근거지하여 활동한 경중(京中)유림을 중심으로 호남유림 그리고 영남유림이 모두 참여하였는데 이를 주도한 경중유림의 김창숙은 물론 호남의 거유(巨儒) 전우(田愚)와 영남의 거유였던 곽종석 등을 지도자로 추대하고 무려 137명이 서명에 참여하였다.(나중에 이 숫자는 159명으로 늘어난다) 유림의 주장에 의하면 그 많은 서명인에도 불구하고 발각 이후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에 한 사람의 변절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앞서 33인의 독립선언자 중에 천도교와 기독교계 변절자 3명이 나온 것과 많은 지식인과 고위층이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과 대조된다.)   


        

파리장서에는 많은 지역에서 많은 유림이 참여를 했기 때문에 여러 곳에 그 기념비가 있다. 최초의 파리장서비는 1973년 대통령 하사금과 성금으로 서울 중구 장충동에 세워졌고(1973년), 이어 경남 밀양(1992년)과 대구(1997년), 경남 거창(1997년), 충남 홍성(2005년), 경남 합천(2007년), 전북 정읍(2009년), 전북 고창(2014년), 경북 봉화(2014년), 경남 김해(2017년)에 이어 2018년에 드디어 본거지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경남 산청에도 파리장서비가 세워졌다. 최근인 2022년 8월에는 진주시 수곡면에도 파리장서비가 들어섰다. 각 파리장서비에는 각 지역을 대표하는 유림의 뜻을 기리고 있다.(파리장서비가 세워진 곳 중에서 산청과 거창, 봉화, 합천은 모두 면우 선생과 인연이 있는 곳이다)          



 산청군 단성면의 유서 깊은 남사마을 예담촌에는 요즘에도 아름다운 전통마을의 멋을 보려고 많은 분들이 찾는다. 바로 그곳이 면우 곽종석 선생의 고향이다. 또 유적지가 있는데 면우 선생은 파리장서를 통해 우리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알린 파리장서 작성의 중심인물이다. 기록에 의하면 면우 선생은 남면 조식과 이진상의 사상을 잇고 많은 유학자들과의 교류로 한국 유학사를 결산한 대학자로 추앙되고 있으며, 항일운동이 이론적 기반을 닦았다. 심즉리설은 그가 세운 유학 결산의 내용이며 파리장서는 우리가 독립해야 함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글이라고 한다.           

면우 선생은 유학뿐만 아니라 서양학문 등을 망라하여 공부하여 유교의 예학이나 경학 외에도 한문학이나 지리·농업·산학(算學)·병법 등 다분야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난한 선비의 가정에서 태어난 면우선생은 남달리 총명하여 네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다섯 살 때부터 『십팔사략(十八史略)』을 읽기 시작했으며, 열 살이 되기 전에 『사서(四書)』와 『시경(詩經)』 그리고 『서경(書經)』을 모두 마쳤다. 열두 살 때 부친을 여읜 후 더욱 학문에 전념하여 유교 경전은 물론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경전까지 섭렵하였다’고 한다. 후학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책을 읽는 안광(눈빛)이 얼마나 힘이 들어 있는지 읽고 있는 책의 종이를 뚫어 뒤로 나올 것 같았다고 한다. 남명 선생처럼 평생 학문을 했을 뿐 벼슬로 나아가지 않았고 고종이 현감에서 중추원 의감, 의정부 참찬까지 제수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그 면우 선생 생가지, 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에, 면우 선생과 유림의 독립 의지와 노력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 ‘유림독립기념관’이다. 독립기념관이 있는 남사마을 예담촌은 예부터 국내 굴지의 대저택들이 모여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비가 와도 처마밑으로만 다니면 비를 맞지 않고 동네를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동네가 6.25 때 연합군 공습으로 전부 불탔고, 일부 남은 것과 복원한 것이 현재 우리가 찾는 남사마을 예담촌이라고 한다. 현재도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데 원래의 모습은 얼마나 대단했을까 짐작이 안 간다.          

남사마을 파리장서비는 다른 곳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보통 이러한 비를 세울 때 나라에서 지원을 받아 세우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곳은 지역 뜻있는 분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것이라는 것이다. 이곳 파리장서비는 누구의 지원 없이 스스로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 정성과 마음에 눈물겹도록 감동적인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축제의 계절이다. 축제를 보면서 때로는 우리 조상의 뜻을 새겨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남사마을의 아름다움만 볼 것이 아니라 을사조약 이후에 이름을 곽도로 바꾸고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위해 노력을 다한 대유학자 면우선생과 유림들의 노력을 기억하고 있는 유림독립기념관을 들러볼 일이다. 참, 네이버지도에는 유림독립기념관이 나오지 않는다. 카카오맵이나 티맵을 쓰면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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