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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 Oct 14. 2023

경남에도 피라미드가 있다고?

전구형왕릉이야기

             

피라미드 중에 가장 유명한 이집트 피라미드는 돌로 된 무덤이다. 이것뿐만 아니라 밑부분이 넓고 위로 갈수록 작아지는 구조물들도 피라미드라고 부른다. 유사한 건축물이 이집트와 가까운 아프리카 수단을 비롯하여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 등지에도 있다. 유럽의 보스니아에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가 있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도 피라미드가 있을까? 돌로 된 피라미드, 아주 정확하게 방위가 맞춰지고 잘 다듬어진 돌로 쌓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도 몇 개의 피라미드가 있다. 그중에 가장 크고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우리 경남, 서부경남에 있다. 전구형왕릉이다.           

구형왕릉의 이야기는 멀리 가야시대로 올라간다. 도시국가의 연합형태였던 가야는 금관가야를 비롯하여 소가야, 고령가야 등이 차례차례 신라에 복속되고 고령을 근거로 한 대가야만이 명맥을 유지하다가 진흥왕 때 마지막으로 신라에 귀속된다. 구형왕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다. 김수로왕의 자손으로 금관가야 10대 왕이다. 신라 법흥왕 19년(532년)에 아들들과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했다. 그 대가로 상등의 직위와 본국을 식읍으로 받았다고 한다. 그 후 구형왕은 산청 옥산으로 와서 5년간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 구형왕이 자신의 사후에 나라가 없어져서 자신의 무덤이 도굴될 것을 염려하자 후손들이 사방에서 돌을 모아 돌로 무덤을 쌓았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이 산의 이름도 왕산이다. 구형왕의 증손자가 김유신 장군이다.     

나무위키의 ‘전구형왕릉’의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 구형왕의 능으로 전하는 무덤은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 16’에 위치해 있으며 진입로의 도로명은 구형왕릉로로 지정되어 있다. 1971년 2월 9일부로 사적 제214호로 지정되었다. 일반 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에 위치했는데 높이 7.15m인 기단식 석단이 있다. 총 7층으로 구성되고 무덤 정상은 타원형이다. 

조선시대 문인이었던 홍의영(洪儀泳,1750∼1815)의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남아있다. ‘무덤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는데,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王山寺記)》에 구형왕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왕산사기를 발견한 내용이 기록되어있는데, ‘약 200년 전 산청군 유생 민경원이 산에 올라 기우재를 지내고 내려오다가 비가 내려 왕산사에서 비를 피하던 도중 왕산사 법당 들보 위에 있는 목궤를 발견하였는데 왕산사에서 구형왕릉의 내력을 적은 산사기(山寺記)를 발견하고, 구형왕과 왕비의 옷과 칼, 그리고 영정까지 찾아냈다. 이에 정조 17년(1793)에 덕양전을 짓고 이후 봄가을로 추모제를 지낸다.’ ㅡ《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               

이곳에는 재실이 있고 밑 입구에는 양왕(구형왕의 다른 이름)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덕양전*이 있어  아직도 그 후손들은 매년 분향제례를 하고 있다고 한다. 또 왕릉 밑에는 비교적 최근에 지어졌지만(1996년도 창건) 왕림사가 있어 많은 불자들의 소원등을 밝히고 있다(왕산사가 있었다는 기록과 왕산사지는 있지만 왕산사는 조선시대에 폐사되었다고 한다). 산청군에서는 릉 입구까지 도로를 잘 닦아놨다. 주변도 말끔히 단장하고 입구까지의 길도 ‘구형왕릉로’로 이름을 붙여왔다. 인근의 유의태 약수터까지 연계하여 관광코스로 만들어서 세인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그러나 의외로 찾는 이가 적고, 이웃의 동의보감촌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역사적 사료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이것이 구형왕의 무덤일 가능성은 낮다. 아니 무덤조차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부경남에 오랫동안 근거지를 갖고 있었던 가야에 대한 기억이, 금관(김해)에서 대가야(고령)까지 오랜 세월 동안 명멸했던 그 아련한 기억들이 남아있고 그 기억들이 새로운 믿음과 여러 전설을 만들었고 그 전설 중의 하나가 구형왕릉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릉의 이름이 구형왕릉이 아니라 전(傳)구형왕릉이다. 구형왕릉이라고 전해오는 릉이라는 뜻이다)          

역사서에 대가야가 잃어버린 낙동강 유역이 아니라 다사강(현 섬진강)의 항구를 확보하여 중국(남제)과 교역했다는 기록에 미루어 봐 구형왕릉이 아니라 대가야의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의 무덤이거나 혹은 그 방계 국이거나 혹은 작은 왕국이며, 합천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그러나 역사에는 자주 등장하지 않았던 다라국의 마지막 왕의 왕릉인지도 모른다. 아니 왕릉이 아니라 도시국가로서 자유롭게 토론하며 의사결정을 하고 발달했던 그 문화를 유지하려는 작은 소망들이 모여진 탑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뭔지 모를 그것이 우리에게 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내용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듬고 잘 살펴서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다. 그런 의미에서 산청의 피라미드는 소중하다.           

 * 국가문화유산포털에 의하면 덕양전은 ‘가락국 제10대 왕인 양왕과 왕비, 두 분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양왕은 신라 법흥왕 19년(532)에 나라를 신라에 선양하고 이곳 왕산 수정궁에서 생활하다 5년 후에 돌아가셨으며, 그 뒤 제사를 올리다 전쟁 때문에 중단되었으나 1798년부터 다시 항례를 올렸다.’고 한다. 또 ‘광무 2년(1898)년 덕양전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30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후 1991년 고쳐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 합천군과 경상국립대학교 박물관이 주관한 ‘다라국- 그 위상과 역할’ 주제의 학술대회 발표집을 보면 다라국의 유물은 대략 2세기부터 5세기 후반까지의 역사물로 보고되고 있다. 합천에는 이 다라국 고분 외에도 삼가면 지역에 또 다른 고분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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