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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 Nov 04. 2023

숫자 표현 속에 숨은 지혜

       

예전, 초등학교 다닐 시절에, 어머니가 광(창고)에 가서 감자를 가져오라고 시키실 때, 감자를 세 개 가져오라고 하지 않고 ‘서너너덧 개’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러면 다시 되물었다. 서너너덧 개요? 어릴 적에는 이런 표현이 참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여겼다. 세 개면 세 개고, 네 개면 네 개지 서너너덧개라는 표현은 심부름하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실천하기 곤란한 주문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 보니 참으로 적확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감자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표준품이 아니어서 크기의 차이가 많았다(아마도 옛날에는 더 크기 차이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 작은 것 3개로는 네 식구용 한 끼 식사로는 조금 부족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너무 큰 것으로는 3개가 많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 식구가 둘러 않아 먹기에 적당한 수량은 아주 큰 것은 3개, 아주 작은 것은 5개가 적당하고 중간 크기로는 4개가 적당할지 모른다. 이러한 선택 권한과 판단 능력을 아이들에게 실어 주기 위해서 우리 어머니들은 다양한 숫자 표현을 에둘러 표현했다고 한다. (위 예문에서 너덧은 ‘네댓’으로도 표현되지만 ‘너댓’으로 표현하면 안 된다. ‘너댓’은 사전에 없는 말이라고 한다)     

우리말에는 이와 같이 여러 개를 한꺼번에 표현하는 말들이 여럿 있다. 여러 가지 수량을 어림잡을 수 있도록 한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 또는 둘쯤은 ‘한두’, 둘이나 셋쯤은 ‘두세(두셋)’, 셋이나 넷쯤은 ‘서너’라고 한다. 또 넷이나 다섯쯤을 ‘네다섯, 너덧, 네댓, 너더댓’이라고 하며, 다섯이나 여섯쯤을 ‘대여섯’, 여섯이나 일곱쯤을 ‘예닐곱’, 일곱이나 여덟쯤을 ‘일고여덟, 일여덟’, 여덟이나 아홉쯤을 ‘여덟아홉’이라 한다. 요즘 잘 쓰지는 않지만 열 개 남짓한 것은 ‘여나무개’라고 표현했다.

이 중에 '서너'와 '너덧'은 '세네 (개)', '너댓 (개)'등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흘’이 4일이 아니고 3일이듯, 서너 개는 세 개가 아니라 세 개나 네 개쯤을 의미한다.     

위의 말들은 더 줄여서 얘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어 서너너덧 개에서 대여섯 개를 퉁처서 '한 댓 개'(발음상으로는 ‘한, 대앳 개’)라고 표현한다. ‘한’이라는 말과 숫자를 합하면 그쯤이 되는 데 끝에다가 ‘-쯤’을 붙이면 더 확실한 뜻이 된다.     

요즈음은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시대다. 과학도 한 동안 그랬다. 그렇지만 모호해 보이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정확하고 적확한 경우도 많다. 양자역학이 주류가 되면서 이제는 확률적인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지 오늘따라 지난 어른들의 말씀이 귓가에 더 맴돈다. ‘애야 광에 가서 사과 서너개만 가져다 다오, 아니 너덧개는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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