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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 Nov 25. 2023

진주시와 천안시, 그리고 충무공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기록되는 중요한 전투다. 불과 3천여 명의 병력으로 열 배 가까운 3만의 적을 맞아 승리로 이끌었고 육로에서 왜군을 막아내면서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킴은 물론 육지의 안정을 이뤄 이순신 장군이 해로에서의 봉쇄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때 우리 측 수장이 바로 진주목사,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다.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적의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공의 위패는 진주의 충렬사에 배향했으나, 고종 때 전국의 서원 및 사당을 철폐하면서 충렬사도 덤으로 훼철하여 공의 숙부 김제갑의 사당인 충렬사에 합사 했다가 충민사로 고쳐 세웠다고 하며, 공의 묘지는 처음에는 충청북도 괴산군의 선산에 있었다가 후에 충주시 살미면 무릉리로 이장되었으며, 충주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해서 1976년, 현 위치인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로 재이장함과 함께 사당 충민사를 세웠다고 한다.     

공은 1554년 9월 23일, 충청도 목천현 갈전면 백전촌(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가전리 백전마을)에서 중훈대부(中訓大夫:종 3품 문관의 품계) 행 사헌부 지평(行司憲府持平:정 5품) 겸 춘추관 기주관(兼春秋館記注官)을 지낸 아버지 김충갑(金忠甲)과 어머니 창평 이씨(昌平 李氏) 사이에서 6남 2녀 중 삼남으로 태어났다.      

그곳은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인근으로 마침 그곳에 출장을 간 김에 오랫동안 가보고 싶었던 공의 유허지에 들려 살펴보게 되었다. 유허지는 생가터로 예상되는 곳을 대지로 보존하고 있으며, 조상의 묘는 있지만 공의 묘는 이곳에 없다. 다만 조금 떨어진 곳에 공이 어렸을 때 뱀을 활로 쏴서 죽였다는 사사처(射蛇處)가 비석과 함께 있다.     

공은 후사가 없어 형 김시회의 아들 김치를 양자로 들여 가문을 이었고, 김득신이 바로 김치의 아들로 공의 손자가 된다. 인조 때 도원수를 지낸 김시양(金時讓)은 김시민의 사촌 동생이다.     

그동안 자세히 살피지 못했는데 백곡 김득신 선생이 충무공의 손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더 관심이 간다. 특별히 살펴볼 내용은 많지 않지만 진주에 머물고 있는 시민으로서 한 번은 가볼 만한 곳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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