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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 Feb 29. 2024

훈족에 대하여

 

한국어, 일본어족은 물론 몽고어, 튀르크어족과 퉁그스어족 등 북부 아시아에 생존했던 많은 나라의 조상 격인 나라 중에 흉노(匈奴)가 있다.(우리나라에서는 이 말에 대해서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흉노는 대략 기원전 4~5세기부터 중국 북방지역에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기원전 209년에 묵돌 선우(재위 기원전 209년~기원전 174년)가 부족을 통합하고 흉노 제국을 세웠다고 한다. 흉노 제국은 그 후 약 이백 년간 북아시아를 호령하며 진-한나라를 비롯한 중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재위 시에 흉노는 서쪽으로는 천산산맥과 감숙(Kansu) 지방의 월지국을 정벌하고 동쪽 내몽골 지역의 동호국을 병합시키면서 중국 북방에서 동쪽과 서쪽 아시아를 잇는 거대한 유목국가로 발전하였다.          

북쪽 유목 민족의 군집체에 불과하던 흉노를 강력한 제국으로 발돋움시킨 지도자는 묵돌 선우로 그는 두만 선우의 첫째 아들이었지만 아버지 두만 선우가 후비 소생인 둘째 아들을 승계자로 하려고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자 아버지를 죽이고 최고 권좌에 오른 전설적인 인물이다.     

중국 사서에 의하면 두만 선우는 후비 연지에게서 얻은 작은 아들을 태자로 세우기 위해 첫째 아들인 묵돌을 월지국에 불모로 보내고 일부러 월지국을 공격했다고 한다. 예상대로 월지국이 적국의 왕자인 묵돌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물돌은 월지국의 살해 위기를 모면하고 월지왕의 애마를 훔쳐 도망쳐 돌아왔다. 월지국의 살해 시도를 피해 묵돌이 돌아오자, 두만 선우는 묵돌의 용기를 장하게 여긴다며 기병 1만 명을 거느리는 대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품은 묵돌은 차분히 반란을 준비해서 아버지를 죽이고 선우의 자리에 올랐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소리 나는 화살(명적)을 가지고, 자신 휘하의 1만 명 기병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그는 휘하 병사에게 자신이 어떤 표적을 향해 명적을 쏘면 모두가 그 표적을 항해 활을 쏴야 한다고 가르쳤다. 사냥하러 나가 자신이 명적으로 맞힌 것을 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바로 목을 베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애마도 쏘았다. 몇몇 주저하는 부하를 가차 없이 목을 벴다. 그는 자신의 애첩을 항해 활을 쏘았다. 이번에도 망설이던 몇몇 부하가 목숨을 잃었다. 이런 훈련 뒤에야 그는 아버지 두만 선우를 따라 사냥터에 나섰다. 그리고 아버지를 명적으로 쐈다. 두만 선우는 몸에 가득 박힌 화살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묵돌은 흉노 제국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로 등장하면서 용맹성과 결단력으로 제국을 건설했다. 묵돌이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209년으로, 진나라 장군 몽염이 기원전 215년에 30만의 군을 이끌고 흉노의 지역인 오르도스를 빼앗고 흉노를 북쪽으로 쫓아낸 사건과 기원전 210년 진시황의 사망 그리고 진 조정 내 모함으로 몽염 장군이 자살하게 된 시기다.           

중국 역사서에는 또 묵돌 선우가 선명한 지도 이념을 세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흉노의 동쪽에 있던 동호(東胡) 지도자는 젊은 묵돌이 부친을 죽이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사자를 보내 부친의 명마를 달라고 하면서 흉노를 칠 구실을 찾고 있었다. 묵돌이 군신들에게 이에 관한 의견을 묻자, 대신들은 모두 그 말은 흉노의 보마(寶馬)이니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묵돌은 이웃 나라에게 어찌 말 한 마리를 아끼겠냐며 동호에게 말을 주었다. 얼마 후 동호가 다시 사자를 보내 선우의 연지(후궁) 중 한 명을 보내달라고 했다. 묵돌이 다시 대신들에게 묻자, 그들은 동호가 무례하다며 그들을 쳐서 벌하자고 하였다. 이에 묵돌은 이웃 나라에게 어찌 여자 한 명을 아끼겠냐며 그가 총애하던 연지를 동호에 보냈다. 동호는 또다시 사자를 보내 흉노와 동호 간 국경 지역에 있는 황무지 1,000여 리의 빈 땅을 달라고 했다. 묵돌이 대신들에게 이를 묻자, 대신들은 그곳은 필요 없는 땅이니 동호에게 주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묵돌이 대로하여 '땅은 국가와 백성의 근본인데 어찌 그것을 줄 수 있단 말이냐?'며 반대하는 대신들을 처형하고 동호를 급습하여 정복하였다. 흉노의 묵돌을 얕본 동호는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되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묵돌이 '땅은 국가와 백성의 근본'이라는 국가 기본 이념을 확실하게 제시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확실한 국정 방향을 설정하고 전체 부족을 한 방향으로 이끌어 흉노는 그 당시 최강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흉노는 영토를 3 부분으로 나누어 중부는 자신이, 좌부와 우부는 각각 왕에게 위임하여 통치하는 3부 체계를 완성하였다. 또 중요 사항은 대신들의 의견을 묻는 제도를 만들었다. 3부 체계는 나중에 돌궐과 몽고로 이어지고 의견을 묻는 이 제도도 튀르크 국가들에서 토이(toy) 또는 쿠룰타이(kurultay)라는 제도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군사제도를 만들어 10(소대), 백(중대), 천(대대), 만(사단)의 체계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튀르키에 육군사령부는 흉노 제국의 창건자 묵돌 선우가 정규군을 조직하고 즉위한 기원전 209년을 터키 육군이 창건된 해로 지정하고 있다고 한다.          

체제를 정비한 흉노는 동호뿐만 아니라 실크로드를 점유하고 있던 월지를 공격하여 정복함으로써 북아시아의 동서를 잇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기원전 198년 흉노는 중국의 한 왕조와 대등한 강국으로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만리장성이 양국의 국경이 되었고 한나라로부터 왕실의 공주를 보내 선우의 연지로 삼고 무명, 비단, 술, 쌀 등 상당량의 조공을 받게 되었다.      

한편 흉노에 쫓겨난 월지는 중앙아시아로 밀려나 그곳에서 대월지를 세웠고, 일부는 인도 서북부에서 쿠산 왕조를 세웠다. 기록에 의하면 묵돌이 병합한 유라시아의 나라는 26개국에 이른다고 한다. 이러했던 흉노도 한 무제(재위 기원전 141~기원전 87년) 이후에 서서히 쇠퇴하여 축소되고 1, 2차 분열을 통해서 와해되다가 155년에 마지막 남은 북흉노가 선비와 연합한 후한에 의해 패망했다.          

그런데 그 후 약 200년 후에 이들의 서쪽 영역에 있던 일부가 유럽으로 진출하여 동고트와 서고트를 압박하고 밀어붙여, 고트, 게피트, 반달 같은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의 대이동을 유발하여 마침내 서로마를 붕괴시켰다. 훈족의 침입으로 동유럽은 물론 유럽 전체가 오랫동안 혼란을 겪었으며, 훈족은 지도자 울드즈, 카라 톤, 루아를 거쳐 아틸라 시대에 지나면서 유럽의 5세기를 훈족의 시대로 만들었다. 훈족의 영웅 아틸라가 60세 때 젊은 여성과 결혼해서 첫날밤을 치른 후 급사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 유럽은 황인종의 지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유럽의 알타이어 국가인 헝가리의 마자르족도 공식적인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훈족의 후손이거나 훈족의 혼혈족임이 일부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다고 한다. 일반인들의 이름에도 아틸라라는 이름이 많은 것은 훈족 계승에 대한 이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참고문헌: 튀르크인 이야기(이희철, 리수), 터키사(이희수, 대한교과㈜), 인류본사(이희수, 휴먼이스트출판그룹), 만주사통론(이나바 이와키치, 서병국, 한국학술정보), 위키백과, 나무위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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