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한 Feb 11. 2023

[언어이야기]진정성과 수월성에 대한 오해

- 용어의 정의에 대하여



변방이긴 하지만 교육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여러 보고서를 쓰다 보니 독특한 의미를 갖는 용어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중에서는 오랫동안 오해의 늪에 빠져 있었던 용어들이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진정성이라는 용어와 수월성이라는 용어다.


우리가 아는 진정성은 ‘진정’이라는 말의 뜻에 따라 달라진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의하면 진정(眞情)이라는 단어는 명사로 ‘참되고 애틋한 정이나 마음’ 또는 ‘참된 사정’을 뜻하며 유의어로 진심, 충정 등을 들고 있다. 또 진정(眞正)은 부사로 ‘거짓이 없이 참으로’의 뜻으로 유의어는 정말, 정말로, 진짜를 들고 있다.


그러면 진정성은 무엇일까? 같은 사전에 의하면 두 가지가 나와 있는데 진정성(眞情性)과 진정성(眞正性)이다. 진정성(眞情性)은 ‘진실하고 참된 성질’을 뜻하는 말로 ‘얼마나 진실된 마음이나 특성을 갖고 있는가’를 뜻하며, 진정성(眞正性)은 ‘참되고 올바른 성질이나 특성’을 뜻하는 말로 ‘얼마나 올바른가’ 하는 뜻을 갖고 있다. 어느 날 진정성에 해당하는 영어가 ‘authenticity’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형용사 authentic(진짜인, 믿을만한)에서 나온 단어로 영어의 유의어는 genuine(진짜의) original(진본의) real(사실의) actual(실제의) bona fide(진실한) true(사실의)이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최초 번역자는 authenticity라는 말을 진정성(眞情性)이 아니라 진정성(眞正性)으로 번역했던 것 같다. 


2002년 국립국어연구원에서 발간한 ‘현대국어 사용빈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진정(眞情)의 사용 빈도 42회, 진정(眞正)은 24회, 진정(陳情)이 7회, 진정(鎭靜)이 5회였다. 진정성(眞正性)은 5회였다. 일반적인 사용에서는 진정(眞情)이 진정(眞正)보다도 2배 가까이 높았다. 따라서 일반인들은 한자 없이 한글로 표기된 진정성의 뜻을 진정성(眞情性)으로 오해할 만한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한자문화권인 일본과 중국에서는  같은 단어 authenticity를 어떻게 번역해서 사용할까 조사해 보았다. 일본에서는 진정성(眞正性)이라는 단어가 있기는 하지만 확실성(確實性), 진실성(眞實性), 신빙성(信憑性)이라고 주로 번역하고 있다. 중국과 대만에서도 확실성(確實性), 진실성(眞實性)이 주로 쓰이고 있다. 이들은 그들의 글을 한자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이 단어를 혹 진정성(眞正性)이라고 쓰더라도 오해의 여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반면에 우리는 기계화, 전산화가 되면서 한글로만 표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보다 오해가 적은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잘못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교육계에서 더 많이 사용되는 ‘수월성’이라는 용어는 더 헛갈리게 만드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측하듯이 수월성은 우리가 자주 쓰는 ‘수월하다’의 어근 ‘수월’에 ‘-성(性)’을 붙여 수월성을 만든 단어가 아니다. 대응되는 영어를 알아봤더니 ‘exellence’이다. 한자로 바꾸면 수월성(秀越性)이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사전 우리말샘에서는 명사로 이 수월성(秀越性)을 ‘다른 것에 비하여 빼어나고 우월한 성질’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정작 ‘수월(秀越)’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는 나와있지 않았다. 앞의 사용빈도 조사 보고서에도 수월하다(15회), 수월해지다(3회), 수월히(1회)가 나와 있을 뿐 수월(秀越)은 사용빈도 목록에 없다. 일본과 중국에서도 수월(秀越)이라는 말 대신에 각각 우수(優秀)와 탁월(卓越)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대만은 중국과 같았다. 어디에서도 수월이라는 표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번역은 매우 중요하다. 원래의 뜻을 잘 살리고 그것을 그대로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때로는 새로운 말을 만드는 조어도 필요하다. 그러나 한글전용세대인 현대인에게는 가능하면 한글로도 뜻이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런 배려를 못하는 것이 번역자의 국어실력이 모자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헛갈리는 용어를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을 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배제하려는 고도의 전략일 수도 있겠다. 이런 말도 모르면 교육계나 우리가 추진하는 사업에 들어오지 말라는. 


교육계도 이제는 변해야 한다. 이제는 대량 생산의 시대를 지났기 때문이다. 교육자원이 점점 더 귀해지고 있다. 모두가 수월하게 이해하고, 쉽게 배울 수 있어야 크게 성장하고 진실된 사람이 되어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만들고 발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배타와 독선보다는 개성과 성장에 무게 중심이 욺겨져야 하는 이유다. 앞으로는 그러한 모습이 필요하다.


사진은 해운대 백사장의 정월 대보름달 맞이행사 준비현장

작가의 이전글 관상보다 좋은 것이 있다는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