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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 Mar 10. 2024

인구문제에 대한 생각(2)

- 행복이 먼저다.

           

‘나는 내 일을 사랑하지만 절대로 이 일을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이 없다.’, ‘나는 평생토록 이만큼의 회사를 이뤄왔지만, 자식은 다른 일을 하기를 바란다.’, ‘나는 아이들이 을이 아닌 갑의 회사에 근무해서 이런 수모를 안 겪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 아들은 고등고시에 패스해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오랫동안 식당을 해 오신 분이 식당을 물려받을 자식이 없어 문을 닫는다고 한다.’ ‘전통공예를 만들어 오신 분이 이제는 수요가 줄어 전수자도 떠난다고 한다.’ ‘기술개발에 힘써온 중소기업의 경영자도 물려줄 사람이 없어 곧 폐업하고 물류창고에 공장을 팔기로 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이야기다. 오죽하면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자칭 공무원 출신 깡패 최익현(최민수 분)이 자신은 온갖 나쁜 짓을 하지만 아들 최주한은 명문고를 거쳐 검사가 되게 할까.          

인구문제에 웬 직업관이냐고 할 분이 계실 거다. 그러나 자신이 행복한 일을 하고, 일에서 행복을 찾고, 일을 통해서 자신과 사회에 이로움을 주고, 그것을 통해 자부심이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행복이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좋은 직업이라고 여겨지는 직업들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이유이기도 했다. 예전엔 의사 집안에 의사가 나오고 법조인 집안에 법조인이 나오고 했지만, 세월이 변해 직업인 스스로가 일에서 행복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런 직업이라도 다음 세대로 이어지기 어렵다. 세상이 빠르게 변해서 이제는 과거의 직업상 이점이 없어지거나 그런 느린 변화로는 대처하기가 어려운 점도 한몫하고 있다.          

직장에서 종신고용이나 장기근속이라는 말은 설 곳을 잃고 있다. 자연적으로 안정된 것을 찾으려는 노력은 배가된다. 결국 만만한 대안이 없다 보니 교사로 몰렸다가 공무원으로 몰렸다가, 이공계로 갔다가 이공계 기피로 인문계로 몰려 인구론(인문계 출신의 9할이 놀고 있다는)이 제기된다. 요즘 의대 증원을 한다고 하니 수많은 이과 재학생까지 다시 의대로 입학하려고 들썩이고 있다. 전 국민이 부평초와 같이 세류에 이리저리 옮겨 간다. 과거 조선시대에, 부와 권력의 원천이 오로지 관리가 되는 ‘좁은 문’밖에 없으니 온 국민이 자식을 관리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서 문제가 되었다. 돈과 권력을 동원하고, 연줄을 만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데 집안이 다 동원됐다. 그래서 결국 나라가 망하는 형국으로까지 갔다. 나만, 내 집안만 잘 살려고 하는 일방향 쏠림에 의한 폐해다.               

세상은 일원화될 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이 있을 때 성장한다. 줄 세우기가 아니라 자유롭게 달리고 싶은 방향을 달릴 때 성장한다. 나무가 한 방향으로 자란다면 얼마 안 가서 쓰러지는 것처럼 온 방향으로 가지를 뻗고, 마찬가지로 온 방향으로 뿌리를 뻗은 나무는 잘 쓰러지지 않는다. 중앙아시아와 남아메리카에서 유럽인들이 뿌려 놓은 ‘단일 종목 농업’에 의해 폐해를 보면서 한 가지 작물을 대단위로 재배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획일화에 의한 피해는 그것이 사상이든 생각이든 상상하는 것을 초월한다. 역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일방적인 사고를 강요한 때는 반드시 문화적, 경제적 쇠퇴를 가져왔다. 가톨릭이 지배했던 서양의 중세 시대가 그랬고, 성리학이 지배했던 우리나라의 조선 후기가 그랬다.           

대학도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지방대학은 더 말할 것이 없다. 예전에는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망한다고 했는데 요즘은 온난화로 전국의 벚꽃이 거의 동시에 핀다. 더 심각한 비유가 되고 있다. 주위 분들에게 물었다. 자식이 우리 대학(경상국립대)과 서울의 중위권 대학에 동시에 붙었는데 어느 대학을 권하시겠습니까? 자녀분은 어느 대학에 가고 싶어 합니까? 교수, 중소기업 사장, 기업 임원, 자영업자 모두 대답은 동일하다. 이따금 다른 의견을 내는 분이 있는데 그분도 경제적인 면과 주거 문제를 제외하면 답이 같다. 자신도 하기 어려운 일을 남에게 하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만 잘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라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경제적으로 문제가 없는 분, 사회로부터 혜택을 많이 받은 고학력자에게 더 강한 데 이들에게는 ‘전가의 보도’가 있다. ‘사람이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이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라’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제주에는 말이 넘치지 않는데 서울에는 사람이 넘칠까.          

아이들은 어른의 표상이라고 한다. 아이들도 당연히 독립된 존재로서 스스로가 살아갈 권리가 있다. 어른들이 조언할 수는 있지만 강요하거나 강제해서는 안된다. 스스로 살아가는 능력을 없애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른들이 모범을 보여 스스로 행복한 일을 찾고 스스로 행복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어른들은 행복하지 않은데 아이들만 행복하라고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또한 아이들이 행복할 거라고 몰아붙이는 일이 아이들에도 행복을 가져다 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돈과 안정된 직업이 정말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보증할 수 있을까.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우선 우리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믿어야 한다. 세상이 잘 돌아갈 것이라는 것, 우리 자식들이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 그들이 잘할 수 있도록 후원해 주는 것은 그다음의 일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잘살게 된 것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면서 일본의 많은 기업이 들어오고 나서부터라고 생각된다. 일본 기업이 우리나라를 잘 살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상업과 공업을 천하게 여기던 생각이 뒤집히면서 사람들이 상업과 공업에 참여하게 되고 이로서 산업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잘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의 원천은 사(士)가 아니라 농공상(農工商)이고 그중에도 공상(工商)이다. 사(士)에 편중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우리가 가난을 벗어나게 되었고 미국의 무역주의가 오면서 더 발전해 고려 이후 최초로 좁은 땅덩이를 벗어나 전 세계로 뻗어나가 사업을 하게 되면서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고 본다. 이제 우리는 나만, 내 집안만 잘 살려고 하는 작은 사고의 틀에서 다시 벗어나야 한다.           

또 한 가지는 우리의 한을 물려주지 않아야 한다. 부처님도 원수는 원수로 되갚아지지 않는다고 했다. 자비와 용서만이 그 길이라고 했다. 우리에게 무슨 원한이 있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원한 관계에서 살고 있다. 작게는 가난한 사람은 부자에게 원한이 있고 부자는 권력자에게, 권력자는 또 다른 사람에게 원한을 사는 악순환의 고리 속에 있다. 게다가 우리는 크나큰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그 과정 중에 이념 갈등만으로는 치부할 수 없는 엄청난 비극을 덤으로 겪었다. 전쟁으로 죽은 사람도 많았지만 적게는 수십만 명에서, 많게는 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제주와 여수, 산청과 거창, 화순, 함평, 단양, 대전 등 전국 곳곳에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최근에도 광주에서 고난을 겪었다. 지금도 그 상흔이 크다. 거기다가 우리는 급격한 경제 성장을 겪으면서 구성원 간의 틈새도 적지 않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 보니 서로의 입장을 배려하고 존중해 주지 못한 면도 크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간극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서로 간에 진지한 토론과 논리로 해결책을 만드는 데 익숙하지 않다. 많은 경우에 힘이나 법에 의지하여 해결하고자 한다. 나는 잘했으니 잘못된 상대를 정의가 심판해 주리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과 같이 우리가 이 원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복수하는 것이나 더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용서로서만 가능하다. 다른 방법은 잡초를 잠시 돌로 누르는 것과 같아서 조건이 되면 다시 고개를 들고 올라온다. 자비와 진정한 용서만이 악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누가 잘못하고 누가 잘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을 용서하지 않을 때 우리 모두가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다 같이 그러한 굴레로부터 벗어 나는 길은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얽매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럴 때라도 다양성을 계발해야 한다. 나아가는 방향이 내가 원하는 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다. 당연한 결과다. 나아가는 길이 다양할수록 이 다양성이 우리를 더 역동적이고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획일성이 보기는 좋을지 몰라도 세상에 이로움을 주지 않는다. 나만 옳고 나만 올바르다는 생각은 세상을 힘들게 한다. 획일화에 의한 피해는 그것이 사상이든 생각이든 상상하는 것을 초월한다.           

이러한 생각의 근저에는 ‘나’라는 생각과 ‘나만’ 잘 되려는 마음이 있다. 또 이 마음의 근저에는 남과의 비교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은 ‘상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태도에서 오는 것’이라는 말이나, 행복은 ‘비교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발견하는 것에서 온다’라는 말처럼 우리의 태도와 비교하는 습관을 버릴 때 우리는 다 같이 행복해질 수 있는 틈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생각들이 있을 때 인구문제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다고 본다. 모두가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모두가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는 세상, 그런 곳에서 인간적인 행복이 자연스레 피어날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수용하고 한없는 자비와 용서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얽매이고 있는 것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힘써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이 나와 다르더라도 이해하고 응원할 수 있는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런 문화가 자리 잡으면 자연스럽게 인구 증가의 분위기가 형성될 것이다. 마치 숲이 우거지면 자연스럽게 새도 돌아오고 곤충도 돌아와 생태계가 복원되는 것처럼. 지원은 그다음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다음 기회가 되면 조금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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