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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 Jun 16. 2024

무엇을 위한 삶인가?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워낙 교양이 부족하여 책이나 많이 읽으려고 그 당시에 유행하던 서클 활동으로 도서부에 지원해서 들어갔었다. 도서부는 도서관의 책을 관리하고 대출해 주면서, 책을 읽도록 하는 다양한 활동을 하는 서클이었다.           

그곳에는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문화도 있었는데 전통적으로 처음 들어온 신입생의 토론 주제를 ‘Art for art or Art for life’로 하여 진행하였다. 다시 말하면 ‘예술은 예술, 그 자체를 위한 것이냐, 아니면 삶을 위한 예술이냐’하는 주제인 것이다. 순수예술을 하는 사람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은 예술의 활용성과 효용성보다는 ‘예술 그 자체’에 의미를 두어 ‘Art for art’의 팻말 쪽으로 가고, 예술이 예술로서의 그 자체보다는 ‘삶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예술로서의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은 ‘Art for life’ 팻말 쪽으로 가서 서로 갑론을박, 토론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도 나는 조금 현실적인 사람이어서 ‘Art for life’ 쪽으로 갔었는데, 의외로 소위 글 좀 쓸 것 같았던 친구들이 반대쪽으로 많이 가서 다소 놀랐다. 토론이라는 것이 서로 말을 통해서 결론을 내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제시하고 의견을 비교하면서, 사람마다 다양한 시각이 있고 다양한 사고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서로 알아가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한창 원기 왕성하던 시절인지라 언성을 높여 서로 자기주장이 옳다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예전에 재료공학과에서 일본의 교수님을 초빙해서 학생들에게 특강을 했다고 한다. 그 교수님은 ‘특정한 방사선이 금속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오랫동안 연구와 실험을 해 오셔서 그 결과를 발표하셨는데 강의가 끝나고 질문 시간에 한 학생이 손을 들어 ‘강의를 잘 들었다고 하면서 교수님의 연구 결과는 어떤 경우에 활용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교수님은 ‘본인이 아는 한 아직 활용할 곳은 없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학생들이 순간 당황했다. 용도가 정해진, 활용성이 큰 분야의 연구에만 익숙한 문화에서 ‘활용할 곳이 없다’는 표현은 도저히 이해되기가 어려운 내용이다.          

나중에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 준 교수님 말씀에 의하면 이러한 것이 바로 일본이 노벨상을 탈 수 있는 배경이라고 한다. 아무 쓸모가 없더라도 본인이 좋아서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현재는 활용성이 없더라도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믿고, 지원하는 시스템이 있고, 그것을 용인해 주고 인정해 주는 학문적인 수용성이 있을 때 뭔가 뛰어나고 새로운 것들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동료 교수나 학생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수용성이 부족한 토양에서는 도저히 나타날 수 없는 사례인 것이다.          

실제 최근 서양에서는 다양성과 수용성을 강조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다정한 조직이 살아남는다.』 (엘라 F. 워싱턴, 갈매나무, 2023)에서 저자는 DEI 즉, 다양성(Diversity), 형평성(Equity) 그리고 포용성(Inclusion)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가 더 넓은 인종적, 문화적, 사상적 수용성을 포함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기업이 실제로 그런 방향으로 나가지 않으면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을 조목조목 제안하고 있다. DEI이 뉴노멀 비즈니스의 경쟁력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포용적인 조직문화에서 혁신의 가능성은 6배나 높아진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기업은 물론 사회 조직의 어느 구석에서도 다양성과 형평성 그리고 포용성을 주장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토론 문화는 점차로 줄어들고 아주 오래전에 나 있었을 것 같은 이분법이 그 자리를 차지해 가고 있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교육과 사회 전반에 그러한 생각이 가득하다. 이야기하다가 싸움이 나는 것은 그나마 나은 경우가 되고 있다.


공자님도 논어에서 “삼인행 필유아사언(三人行, 必有我師焉, 세 사람이 함께 가면 그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이라고 했다. 또 “선악개오사(善惡皆吾師, 선과 악이 모두 나의 스승이다)”는 말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가 우리가 살면서 나와 유사한 사람은 물론, 나와 다른 이질적인 사람에게도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우리 사회를 보면 그런 토론 문화가 점차로 실종되고 있다. 과거 자신의 검색 취향을 반영한 추천 알고리즘에 의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읽거나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만 보게 되어, 계속 유사한 고정관념만을 쌓아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서 세상은 절대적인 Art for art도 없고 완전한 Art for life도 없다. 사실 어느 면이 더 강하냐, 더 많냐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인류 발전에 기여하고 있고 또 순수하게 그것, 자신을 위해서도 존재한다. 현재는 쓸모가 없어 보이는 일이지만 먼 훗날에는 대단히 의미가 있는 일이 있고, 현재는 대단해 보이는 것이 나중에는 하찮은 일이 되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이 각자의 의미가 있고 모든 노력에도 다 의미가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가 다양성을 인정하고 형평성과 수용성을 올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세상은 흑백 이외에도 다양한 색깔이 존재하지 않는가? 노랫말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 우리가 노력을 통해 ‘나름의 삶’을 살고 후대에게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할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수국이 한 아름 핀 정원을 거닐면서, 고교시절 기억의 편린을 더듬어 이 글을 쓴다. 이 자리를 빌려, 좋은 토론 문화를 물려주었던 선배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들에게 한 번도 표현하지 못했던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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