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죽은 악인도 벌을 받을까?
‘윤회를 믿습니까?’ 이렇게 물으니 길을 가다가 낯선 사람이 문득 ‘도를 아십니까?’ 하고 묻는 것과 유사한 느낌이 난다. 윤회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 믿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뉴스에서도 간혹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사람이나 전생의 기억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티베트의 달라이라마 존자처럼 전생을 이어온 것으로 알려진 분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지만 일반인에게 윤회는 아직은 먼 나라의, 검증이 안 된, 그저 여러 이론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윤회는 단순히 ‘우리가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만으로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윤회가 정말 있다면, 그리고 윤회로 현재와 같은 상태로 다시 새로운 삶을 갖는다면 모르겠지만, 많은 학자와 스님들의 의견을 종합하자면, 윤회 후에도 내가 현재의 상태와 똑같은 형태로 태어날지 아닐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남자인 내가 다시 태어날 때 다시 사람으로, 남자로 태어난다는 것을 확실하게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남자였던 몸이 여자로, 또 사람이었던 존재가 동물이나 심지어는 나무나 꽃 또는 다른 생명체로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거꾸로 그런 존재로부터 다시 동물이나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한다고 한다. 힌두교나 자이나교, 불교 등 인도 계통의 종교 학설에 의하면 그것의 결정은 자신이 지은 업(業)의 결과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윤회가 사실이냐 아니냐의 진위를 따지기 전에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래서 다시 태어나 새 삶을 살아간다는 단순한 생각과는 다른 의미의 윤회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윤회로 모든 존재가 다시 태어나고, 태어나면서 다양한 존재로 형태를 바꾸어 태어날 수 있다면, 모든 생명은 결국 같은 가치, 즉 등가(等價)를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남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될 수 있으면 결국 그 둘,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동물이나 식물로 태어날 수 있다면, 그것들의 생명적 가치도 등가가 된다. 아주 작은 바이러스와 같은 미물로도 태어나게 된다면, 그와 같은 존재와도 ‘생명의 등가’를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윤회는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 ‘모든 생명의 귀중함’이라는 뜻도 된다. 이렇듯 윤회의 배경에는 ‘생명 존중’이라는 사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우리가 윤회를 한다면, 우리는 원래 사람도, 심지어 남자나 여자도 아닌 존재가 된다. 우리가 원래 ‘사람’이라는 존재라면 윤회를 하여도 사람으로 계속 태어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존재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무아(無我,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가 된다. 생명의 본질이란 본래 무아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다. 속된 말로 사람의 탈을 쓰면 사람이 되고, 여우의 탈을 쓰면 여우가 되는 것이다. 단지 주어진 인연을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하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무아를 다른 말로 공(空, ‘비어 있는 존재’라는 뜻으로 그래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이라고 하고, 연기(緣起, 서로 인연으로 맺어져서 존재한다는 뜻으로 주체 없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의미)라고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존중받아야 할 가치도 등가인 존재가 된다.
예전에 사찰 행사에서 가장무도회 행사를 했는데 그때 내가 여장으로 분장하고 나오는 역할을 한 적이 있었다. 내 역할이 끝나서 밖에서 쉬고 있는데 유럽에서 온 친구가 나에게 ‘게이’냐고 묻는다. 절에서 그런 분장을 해도 괜찮냐고 심각하게 묻는다. 그래서 웃으면서 ‘당신은 남자인가’, ‘태어나기 전에도 남자였는가’라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사찰의 유명한 수행 방법인 간화선의 화두(話頭, 참선하는 주제) 중 하나에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에 무엇이 나의 본래면목인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 것도 그러한 근원적인 물음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윤회의 다른 뜻은 인과응보에 있다. 현재의 삶(현생)에서 나쁜 일, 악독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법망을 피해서 호의호식하다가 죽는다면 누구나 나쁜 일을 하고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세상을 활보하게 될 것이다. 또 태어나자마자 아무런 악행이나 잘못이 없었는데도 사고나 병으로 죽는 경우에 윤회가 없다면 다른 설명이 어렵다. 단지 하늘의 뜻이라거나 신의 섭리하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윤회와 인과응보가 결합되면서 우리는 선하게 살아야 하는 당위성을 확보하게 된다. 과학적으로도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라는 것에 일치하게 된다. 악행은 악연의 과보를 받고 선행은 선한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과도 일치한다. 콩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우리 속담과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선한 과보를 받고, 악한 일한 사람은 악한 과보를 받는다는 유교 논리와도 일치하는 것이 된다.
윤회의 또 다른 뜻은 ‘윤회를 멈추게 하는 방법이 무엇일까?’하는 것에까지 다다르게 한다. 이것은 부처님이 되기 전 태자였던 시절, 싯다르타가 고민했던 문제와도 맥을 같이 한다. 왜 사람들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가 하는 것과 같은 물음이다. 윤회의 주체는 인도 고대의 브라만교나 힌두교에서 아트만(Atman)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불교에서는 그와 같은 고정된 실체를 부정한다. 만일 고정된 실체(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아니든)가 있다면 그것은 불변의 것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윤회를 하도록 하는 그 근본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게 된다. 다소 무거운 주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윤회가 주는 의미의 무게는 느낄 수가 있다.
‘윤회를 아십니까?’라는 말의 어감에서 출발하여 말이 길어졌다. 윤회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한이 없으니 언제 시간을 내서 그 이야기의 끝을 되돌아봐야겠다. 페친의 글에서 한강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4.3 사건으로, 진주 출신의 진압대 탁성록 소령으로, 다시 보도연맹으로 돌아가는 글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몇 자 적어 본다.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하느니라> 명심보감 첫머리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