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 히스와 댄 히스가 공동 집필한 『순간의 힘(박슬라 옮김, 웅진지식하우스)』의 ‘완벽한 순간을 미루지 말 것’이란 부제가 붙은 내용(82~85쪽)에서 ‘유진 오켈리’가 쓴 『인생이 내게 준 선물』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그 책에서 오켈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었다. 앞으로 살 날이 3개월이 남았다는 선고를 들었다.’ 그는 다형성 교모세포종이라는 희귀 암에 걸렸다. 머릿속 뇌에 골프공만 한 악성종양 3개가 자라고 있었다. 암 선고를 받을 당시 오켈리는 40억 달러 매출에 2만 명이 고용된 회계법인의 CEO였고, 두 딸 중의 막내는 중학교 여름방학을 지나고 있었다. 치료법은 없었다. 그는 자신과의 인간관계에 따라 5개의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이름을 적었다. 그 원에 해당하는 사람들과 아름답고 의미 있는 작별의 시간을 보내길 원했다. 맨 밖의 원에 있는 비교적 관계가 먼 사람들, 주로 사업 관계자들과의 이별은 비교적 간단했다. 전화를 걸거나 이메일을 보내 그들과 공유했던 지난날의 추억이나 행복한 기억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 대화가 너무 슬퍼지거나 우울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그는 그들과의 마지막 대화가 ‘특별’하길 원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원은 그보다 가까운 친구나 동료였기 때문에 직접 만났다. 그들과의 만남이 ‘기쁨’으로 가득하길 소망했다. 같이 근사한 식사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호수가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하거나 아름다운 장소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 과정에서 오켈리는 친구들과 추억을 나누고 인생에 관한 생각을 주고받았고 그동안의 우정에 감사를 표했다. 오켈리는 이런 절정의 순간을 ‘완벽한 순간’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여름 내내 가까운 친지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제 남은 원은 가장 중심에 남은 원이었다. 그는 두 누이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별장 호수로 날아온 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호수에서 보트를 탔다. 그는 어머니에게 지금 편안하다고 얘기하고 천국에서 다시 뵙자고 했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의 어머니는 그 말에 안도하셨다. 그는 그의 아내, 두 딸과 함께 그곳에서 남은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에 그는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나는 지난 2주일 동안 지난 5년간, 아니 암에 걸리지 않고 예전처럼 살았다면 앞으로 5년 동안 겪었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완벽한 순간들과 완벽한 나날들을 경험했다. 당신이라면 완벽한 나날이 보이는가? 당신에게 완벽한 30일을 만들어 보라면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는데 얼마나 오래 걸릴까? 30일? 6개월? 10년? 아니면 평생 걸려도 불가능할까? 나는 하루에 1주일을, 한 주에 한 달을, 한 달에 1년을 산 기분이다.’
그는 책에서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앞으로 살 날이 3개월 남았다는 선고를 들었다’라고도 했다. 중요한 순간을 향유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을 우리가 배운다면 살날이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남아있을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납작하고 지루한 생활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유진 오켈리는 불치병에 걸린 후에야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른 사례다. 내가 아는 분의 아버지이다. 그분은 팔십구 세의 고령으로 평소에는 건강 체질로 병원에도 거의 안 갔었다고 한다. 어느 날 몸이 이상하여 아들을 불러 병원에 갔는데 검사 결과 온몸에 암이 퍼져 3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수술해도 4개월을 살기가 어렵다는 소견이 나왔다. 그래서 가족회의를 했는데 가족들, 특히 장남이 우겨서 수술을 하기로 했단다. 해 볼 수 있는 데까지 해 보자고 했단다. 그분은 워낙 고령인 데다 이미 손쓸 상황이 아니어서 수술실과 중환자실을 왔다 갔다 하다가 4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마지막에는 기력이 쇠해서 기운이 없고 중환자실에서 있었던 터라 가족과의 면회도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 운명하는 모습은 아무도 지키지 못했다. 그동안 들어간 병원비와 간병비 등 자식들의 경제적인 부담도 상당했지만, 지방에 거주하던 다른 가족, 친지들까지 육체적, 정신적 부담도 상당했다. 아무도 ‘얼른 쾌차하시라’는 의례적인 말 이외에 그동안의 좋은 추억과 감사의 말을 꺼내지 못하고 저 멀리 던져 버렸다. 환자와의 아름다운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인정하는 것밖에 없는데 환자와 그의 가족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썩은 동아줄 같은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우리 사회가 너무 정에 얽매여 있거나, 정작 당사자보다는 남겨진 자식들에게 쏟아질 남의 눈치나 보면서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혹시나 환자가 아름답고 품위 있게 생을 마감할 수 있는, 선물 같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자식들의 체면을 위해 더 많은 기회를 날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쪽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또 일률적으로 정할 수도 없는 문제다. 그러나 어느 것이 더 인간답게, 또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지는 분명하다. 우리 모두가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남은 시간이 짧든 길든 시한부 인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