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시 경남혁신도시의 한국토지주택(LH)공사 본사 건물 입구에 LH토지주택박물관이 있다. 우리나라 주택과 도시의 변천사를 볼 수 있는 작지만 의미 있는 박물관이다. 얼마 전 아내와 같이 그 박물관을 둘러보다가 아내가 문득 의문을 제기하였다. ‘왜 우리나라 전통 주택에는 2층집이 없지?’ 그래서 마침 박물관 입구에서 근무하는 분이 있어 ‘동북아 3국이 모두 같은 문화권인데 일본과 중국에는 2층 건물이 발달되어 있는데 왜 우리나라 주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느냐’고 물었다. 유사한 문화권에서 우리나라만 2층집을 볼 수 없는 것이 아내에게는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되었던 모양이다. 신라 시대에 이미 황룡사 9층탑과 같은 고층의 목조 건물을 만들 수 있었으면 목조로 2층집을 지을 기술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목재로 지은 누각이며, 망루 등이 모두 2층집이 아니던가?
그분이 당황하면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답을 알려주었다.
‘온돌 때문이라고 하네요. 아무래도 겨울이 추우니까 온돌이 필요한데, 2층집을 만들면 온돌을 설치할 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요?’
그분은 검색을 통해서 그렇듯 한 이유를 몇 개 더 찾았다.
그것은 ‘임금이 사는 왕궁이 1층인데 양반이나 일반 시민들이 2층을 지어 살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또한 ‘풍수지리의 영향’을 들고 있다. 우리는 땅의 기운을 중요하게 여겨서 땅에서 떨어진 2층에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럴듯한 이유다. 상하가 확실하게 구별되던 시대였고, 조상 묏자리를 비롯하여 풍수의 영향이 크던 시절이니 그럴 만도 한 이야기다.
그래도 뭔가 이유가 덜 차서 재차 물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요?’
그래서 같이 찾아낸 것이 ‘우리 건축 재료 중에 지붕을 구성하고 있는 기와와 기와를 붙이기 위해 사용하는 진흙 등의 무게가 무거워서 2층으로 만들기가 어려웠다’는 이유와 ‘사생활을 중요시해서 집 둘레에 담을 쌓는 문화가 있다 보니 2층과 같이 남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2층이 발달하기 어려웠다’는 등등의 이유였다. 그 이외의 이유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분 고유의 업무도 있을 텐데 계속 방해하고 있을 수 없어서 감사의 예를 표하고 자리를 나섰다.
그러다가 나중에 초가집들만 가득했던 구한말 외국인들이 찍은 우리의 옛 사진들을 보면서 문득 느낀 생각이 있다. 혹시 고려왕조 이후 조선에서 성리학 사상의 독주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풍조가 강조되고, 해상을 통한 대외 무역의 역할이 줄어들고 오로지 농업과 가내수공업의 경제에 의존하다가 보니 국가경제력이 떨어져 산업이 퇴보된 까닭에 굵은 나무를 대량으로 재배하는 기술이나 2층집을 지을만한 건축술 등의 발달은 물론 인구나 경제력도 줄어들어 2층집을 지을 엄두를 못 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구가 늘어나고 산업이 발달하여 도심의 인구밀도가 증가하면 2층집의 수요는 자연히 생기지 않았을까. 수요가 줄어드니 필요성도 줄어들고, 필요가 없으니 개발을 안 하게 되어 2층집이 없어진 것은 아날까. 신라 시대에 수도인 서라벌의 가호 수가 25만 호였고 처마 밑으로만 다녀도 비를 맞지 않고 다닐 수 있다고 기록되었으며, 황룡사의 규모만 봐도 엄청난 것으로 봐서 그 당시에 그 정도 국제도시 규모라면 분명 2층집이 존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거의 500년 뒤에 건국된 조선에서 그리고 500여 년 동안 유지했던 나라에서 2층집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 있기 때문 아니었을까?
물론 우리나라 겨울이 추워 온돌이라는 난방 문화가 없으면 견디기 어려웠던 점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단열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밖이 추우면 안에 열기가 없으면 견디기 어렵다. 그렇다고 밖과 안을 차단하고 안에서 불을 피운다면 가스로 인해서 질식사하기에 알맞다. 그래서 나무를 때서 생긴 불길과 집안의 공기 길을 분리하는 기술이 발달했는데 그것이 온돌인 것이다.
얼마 전에 우리 대학 학생을 포함한 여러 대학의 학생들이 네팔로 자원봉사 갔을 때, 그곳에서 학생들이 발견한 것도 그것이었다. 네팔처럼 공기가 좋은 나라에 폐병 환자가 많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원인이 집안에서 음식을 하느냐고 나뭇가지를 때서 그 연기로 인해서 폐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알고 더 놀랐다. 집안에 연기가 가득 차니 연기를 밖으로 빼기 위해 벽을 얼기설기 엮어 놓았고, 그 덕분에 외풍이 심해 집안이 추워 감기 걸리기 쉬운 환경에서 지내게 된다. 그래서 학생들이 우리의 전통 온돌과 아궁이를 고안하여 만드는 방법을 비디오로 촬영하고 그곳에 전수하여 그들 스스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도록 돕는 방법으로 우리 문화를 전달하였다. 직접 가열로 조리와 난방을 돕고, 남은 열기는 오랫동안 구들로 전달되어 집안을 따뜻하게 하고, 연기는 바닥과 굴뚝을 통해 밖으로 빠지게 되니 벽을 튼튼히 만들어도 문제가 없고 오히려 열효율이 좋아 생활환경이 개선되었다.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서 만일 우리나라에서도 인구가 밀집하여 2층집이 계속 발달해 왔다면 정말로 1층이 아닌 2층에 난방 대책이 없었을까? 용불용설이라 아마도 수요가 많이 있었으면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그 대안을 마련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요가 많지 않았거나 그런 기술을 만들 기술자가 없었다는 말이 된다.
요즘은 외국에서도 우리 주거 문화 특징의 하나인 온돌이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온돌을 직접적인 가열이 아닌 물을 순환하는 방법을 고안해 낸 덕이 크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아파트는 온돌방식이다. 옛날 연탄보일러부터 현대의 중앙집중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계보를 잇고 있다. 이러한 아파트 문화는 정말 상전벽해의 변화상을 보여준다. 내가 사는 아파트도 25층인데도 고층아파트에는 속하지도 못한다. 그런 시대의 변혁과정이 고스란히 LH도시주택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경남혁신도시가 진주에 들어서면서 진주 시민과 경남 도민들에게 많은 도움과 의미를 주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박물관이다. LH토지주택박물관은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에 무료 개방하고 있으니 아이들이 없더라도 한번 들려볼 일이다. 마침 근처에 봄꽃들도 만개하고 있어 볼거리도 많아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