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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구글 글래스를 아쉬워하며...

by 대한

벌써 오래전이다. 인천시 부평의 한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열심히 터전을 닦기 위해 노력하던 그때, 전철을 타고 서울로 출장을 가는 전철 안에서 고교 동창을 만났다. 서로 반가워서 손을 맞잡고 안부를 묻던 중에 말이 서로 엇갈리는 것을 느껴 서로 고교 동창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중학교로, 초등학교로, 주제를 옮겨 보았지만 동창은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말투도 어느새 존대로 바뀌었다. 얘기를 해보니 같은 고향도 아니고, 그렇다고 엄청 친한 느낌으로 봐서는 일이나 회사 관계로 만난 것도 아니다. 서로 기억을 맞춰보니 군대 시절, 훈련소에서 훈련받던 시절에 같은 내무반을 쓰던 동기였다. 훈련 내내 같이 고생하다가 서로 다른 자대로 배치되면서 헤어졌던 동기였다. 때마침 내가 전철에서 내릴 때가 되어 서로의 미래를 축원해 주긴 했지만 연락처도 제대로 주고받지 못하고 헤어졌다.

이때만 해도 훈련소에서 잠깐 같이 지냈으니 서로 못 알아보고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사회생활을 통해 많은 경우를 만나면서 내가 사람의 얼굴이나 이름, 그리고 상황에 대한 기억을 남들보다 또렷하게 잘하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끔 동창을 만나면 학창 시절 당시의 상황이나 했던 이야기들을 나보다 훨씬 더 또렷하게 기억하는 친구가 있어 놀랄 때가 많다. 또 같이 여행을 갔다가 와도 그때 안내판에 있었던 내용이나 세부 사항을 잘 기억하는 친구가 있다. 연도며, 건물의 주인공이며. 어떤 때는 몇 년 만에 찾은 옷 파는 가게 주인이 나를 알아보고(겨우 두 번째 방문인데도 말이다) 그 당시의 내가 샀던 옷이며, 취향을 이야기하면서 새 옷을 추천해 줄 때는 한동안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나 같은 사람은 옷 가게를 절대로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사람마다 기억의 기능이 다르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숫자에 강하고 어떤 사람은 사람 얼굴을 잘 모기억하고 어떤 사람은 사람 이름과 같은 문자 기억에 강하다. 물론 어떤 사람은 든 것을 잘 기억하는, 기억력이 아주 좋은 사람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자기 주전공(?)이 있기 마련이다. 또 대체로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이 점차로 약해진다. 예전보다 기억력이 떨어지기도 하고 기억은 하지만 기억을 불러내는 것에 어려움을 겪어 입안에서 맴맴 돌다가 겨우 단어를 불러내곤 하기도 한다. 아마도 꼭 기억해야 할 것만 기억하라는 뜻인가 보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도 세계적인 유명 패션잡지 런웨이(영화 중의 가상잡지)의 편집장으로 열연한 메릴 스트립(미란다 프리슬리 분)의 여비서, 앤드리아(앤디 색스, 앤 해서웨이 분)가 여러 사교 모임에서 기억력이 쇠퇴하고 있는 편집장 곁에서 상대방이 누구인지 기억했다가 작게 이야기해 주는 모습이 나온다. 누구나 기억력 좋은 비서를 채용해서 데리고 다닐 수는 없지만 다행히 요즘에는 누구나 ‘손 안의 컴퓨터’, 스마트폰을 갖고 다닌다. 그곳에 유용한 여러 메모 앱이나 정보를 관리하는 앱이 있어서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오히려 이들을 믿다가 기억력이 더 나빠진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휴대폰이 생기고 나서 다른 사람의 전화번호를 외우는 능력이 급격하게 퇴보한 것처럼 말이다. 예전에 문자가 없었을 때는 모든 것을 기억에 의존해서 전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기억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문자가 사용되면서 점차로 기억의 역할이 줄어들고, 기계화되면서 거의 퇴보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최근에는 컴퓨터와 인공지능이 보편화되면서 기억력은 물론 사고력까지 줄어들게 되는 단계로까지 발전(?)을 하고 있다. 이것이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에게는 확실하게 ‘발전’이 틀림없지만 뒤쳐 가는 사람에게도 발전이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타나는 ‘자연 현상’을 굳이 탓할 것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사람이 정확하게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을 때는 참으로 난감하다. 얼굴은 익은데도 말이다. 그래서 가끔 구글 글래스처럼 ‘눈앞의 모니터’가 개발되어서 어떤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의 과거에 대해서 모니터에 나타내거나 혹은 정보를 이어폰으로 알려주는 장치가 다시 나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눈앞의 상대방 정보뿐만 아니라 연결이 필요한 사람을 찾거나, 기억이 가물가물한 사람을 찾을 때도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다른 검색에서도 유용할 수 있어서 경제력이 있는 시니어에게는 수요가 있을 것 같다.

몸의 기능을 기계나 기구 같은 외부에 맡기면서 자신의 기능 저하를 한탄하고 있는 때에 또 다른 상상으로 편의를 추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 나도 ‘게으른 생각’이 늘 지배하고 있는 ‘인간’ 임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필요(불편)가 발명을 낳는다.’는 에디슨의 유명한 말처럼 어떤 불편이 발명을 낳는 계기가 되는 것은 틀림이 없으니 두고 볼 일이다. 먼 훗날 어떤 곤란한 시간에 또 다른 한탄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이제는 컴퓨터 글래스가 없으면 아무도 기억할 수 없어.’


그래서 세상은 늘 요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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