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미널 오피스 (직장 연재소설)

2화|어두운 동굴 속 그림자

by Rachell Consulting

동굴 안의 사람들에겐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로만 보일 뿐이었다.


회사도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앞에 드리운 그림자만 보며
그게 전부라고 믿고 있었다.



“서 과장, 오늘 고객사 PT 오후 두 시라고 했지?”


영업 담당 박영준 이사가
서은주 자리 옆에 멈춰 섰다.


“시간 맞춰서 내 차로 같이 이동하지.

오늘 서 과장 발표가 아주 중요해.

키맨은 오너, 류 회장인데
업계에선 까다롭기로 유명한 사람이야.
준비는 다 된 거지?”


“네, 이사님.
발표 자료는 출력해서 제본했고
전달할 샘플도 준비했습니다.”


박영준 이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영준 이사의 차는 언제나 깨끗했다.

광이 나는 대시보드와 정돈된 시트,

불필요한 물건이라곤 하나도 없는 내부.


고객사로 향하는 차 안은 조용했다.

통화도 없었다.


박이사와 외근이 잦은 서은주에겐

이 조용한 차 안이 익숙했다.


문득 어제 퇴사한 남도현 차장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 차였다.

그때,

남 차장도 서은주와 함께 이 차에 앉아 있었고,

서은주는 바로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들었다.


박영준 이사는 남 차장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남 차장, 실무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영업 사원은 숫자로 말하는 거라고.

영업 1팀에 뒤늦게 합류한 건 알지만,

앞으로도 매출이 저조하면,

옆 팀 '방 부장'처럼 되는 거야, 내 말 뜻 알지?.”


방 부장은 올해 임금피크제 대상이 된

(정년을 앞두고 임금을 단계적으로 삭감하는 제도)

옆 팀 고참 부장이었다.

재작년에 면 팀장이 되었고,

지금은 실제 업무에서는 자연스럽게 배제된 사람이었다.


차 안은 그 말 이후로

더 조용해졌다.


남 차장은 5년 전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전엔 규모가 작은 회사에서 일했다.


이곳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단단한 계급이 존재했다.
회사 안의 핵심 인재들은

반쯤 농담처럼 ‘성골’이라 불렸다.

팀장 차기후보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남도현 차장이 그 견고한 네트워크 사이로

비집고 들어갈 틈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작년 연말 조직 발표 후,

영업 1팀에 새로 부임한 팀장은 남도현 차장보다 나이가 어렸다.

영업 현장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남도현 차장의 의견을 잘 들어주었고

실무에는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다 월간 보고 자리에서

팀장이 남 차장의 보고 자료를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읽어 내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박영준 이사가 동의하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
남도현 차장은 자신이 어느 자리에 서 있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영업 1팀의 다른 사람들은 기존 거래선을 만나느라 바빴다.
고객 미팅과 외근이 이어졌다.
그 사이 실무와 내부 서류 작업은

자연스럽게 새로 합류한 남 차장에게 쏠렸다.
하루 종일 자료를 만들다

불 꺼진 사무실을 나서는 날이 잦아졌다.


어느 저녁,
남도현 차장은 여전히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바라보다가
잠시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왔다.

흡연실 앞에서
같은 팀 김태균 부장이 통화를 하고 있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여유 있는 웃음이 섞여 있었다.

“아, 그건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서 정리해 드립니다.”

통화를 마친 김태균 부장은
남 차장을 보더니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넥타이를 고쳐 매며 말했다.

“남 차장도 가끔은 밖에서 일해야지.

맨날 사무실에만 있으면 뭐가 보여.”

그는 가볍게 웃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걸음은 느긋했고, 등은 곧았다.

남도현 차장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흡연실 안으로 들어가지도,
그렇다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자리에 서면,
나도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류에 묻혀 사라지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의 보고서를 대신 만들어주지 않아도 되는 자리.
폼나게 거래처를 만나고, 성과로 이름이 불리는 사람.

남도현 차장은
담배에 불을 붙이지 못한 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생각 하나가
자신을 어디까지 데려가게 될지.

어떤 사람이 되게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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