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기행 1
6월의 주말 오후, 남도로 가는 버스를 탔다. 유월의 햇살은 눈부셨지만 버스 안은 에어컨 바람으로 선선했다. 몇 안 되는 승객들은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학창 시절, 5월이면 광주에 갔다. 광주는 곧 금남로였고 망월동이었다. 그때 버스 안에서 우리가 목청껏 불렀던 노래는 무엇이었나? 노래를 부를 때면 꼭 주먹을 치켜들고 불렀다. 나는 지금 노래도 없이 망월동으로 간다.
혼곤히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깼다. 방귀 냄새다. 잠이 확 달아날 만큼 지독했다. 냄새는 마스크 안으로 사정없이 들어왔다. 범인을 추리했다. 버스기사는 태연하게 운전 중이다. 좌석 건너편의 스키니 입은 아가씨는 졸고 있다. 내 뒤에 앉은 아주머니를 의심했으나 짐 보따리를 옆에 낀 중년여인은 억울해 보인다. 내가 냄새에 골똘하는 동안 버스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남도로 달린다.
광주 터미널에 도착했다. 예전에 광주터미널 대합실에서 5·18 광주의 진실을 고발하는 사진과 대자보를 본 적이 있다. 스무 살 무렵이었다. 내 또래의 청년들이 얼굴이 반 이상 뜯겨나간 사진과 짐승처럼 두들겨 맞는 사진들….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사진들과 함께 있었다. 입술이 부르튼 중년의 여자가 죽은 아들의 사진이 인쇄된 유인물을 내게 주며 격앙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 보았던 무서운 장면들이 한동안 꿈에 나타나서 한밤에 깨어 담요를 안고 떨었다. 전염병처럼 폭력이 창궐하던 시절이었다.
광주터미널은 쇼핑몰이 결합된 복합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80년 광주의 사진이 있던 곳은 광고판으로 현란하게 도배되었다. 터미널 앞의 시내버스 정류소로 갔다. 금남로 가는 버스는 518번이다.
해마다 광주에서는 ‘5월 문학제’가 열린다. 올해는 <코로나 19> 영향으로 6월에 열렸다. 행사는 1박 2일로 진행됐다. 행사 첫날, 늦게까지 술 마신 사람들의 표정이 백지장 같다. 둘째 날 일정은 망월동 묘역 참배다. 무더운 날씨였고 바람도 뜨거웠다. 제일 먼저 김남주 시인 묘 앞에 섰다. 처음 시를 쓸 무렵 전주로 문학 강연하러 온 그를 만난 적이 있다. 나는 시건방진 질문을 했고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성실히 답해주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사망을 알리는 뉴스를 보았다. 묘역 참배 중에 <재난 안내 문자>의 경고음이 동시다발적으로 울렸다.
김형근의 묘는 위쪽에 있다. 그가 원광대 앞에서 운영했던 ‘황토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때는 책 표지를 포장지로 싸 주었는데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소설 <태백산맥>을 포장 없이 사 가는 손님이 제일 고마웠다. 한 계절이 지나도 책 표지를 싸는 솜씨가 좀처럼 늘지 않았다. 서점 손님들은 내가 표지 싸는 걸 기다리며 ‘형근이 형’과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가끔 ‘은밀한 책’을 찾는 손님이 나타나면 사장인 형근이 형을 불렀는데 그는 힐끗 손님 얼굴을 보고선 창고에서 꺼내 주었다. 그가 5·18 광주민중항쟁 수배자 출신이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여러 차례 투옥된 민주투사였다는 얘기를 부고 기사를 보고서야 알았다. 김형근의 묘에 무성히 자라난 잡초를 손으로 몇 번이나 쥐어뜯었다. 땀이 이마에서 줄줄 흘러내렸다.
망월동에서 돌아오는 길은 동화를 쓰는 K와 J가 데려다주었다. 차 뒷좌석에 앉아 까무룩 졸면서 <이정표>의 글자가 고창, 부안, 김제, 군산으로 바뀌는 걸 보았다. 터미널 옆에 주차한 내 차로 옮겨 타자, 긴장이 풀려서인지 방귀가 ‘뽀~옹’하고 나왔다. 어제 버스 안에서 맡았던 바로 그 냄새였다. 6월의 햇살 아래 달궈진 차 안으로 방귀 냄새가 퍼졌다. 문득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불렀던, 방귀 냄새를 풍기면서도 부끄럽지 않았던 그 때의 사람들이 그리워졌다.
* 이 글은 <전북도민일보> 6월 30일자에 게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