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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당재 Oct 30. 2020

낭만의 시대, 풍류의 음률

# 협의 세계

친척들도 없이 추석 연휴가 끝났다. 연휴 마지막 날 지인들과 술을 마셨다. 코로나 때문인지 명절 분위기가 안 난다고 했다. 모두들 묵묵히 술잔을 비웠다. 나도 기우는 달을 보며 취했다. “저 대리운전 좀 불러주세요.” 택시를 타고 나타난 대리운전 기사는 70대다. 신태인에서 태어나서 익산에서 중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반가웠다. “저는 익산이 고향입니다.”


익산은 교통이 발달했기에 멀리서도 통학생들이 다녔다. 신태인, 정읍, 김제, 강경에서 온 학생들이 도시락이 두 개씩 든 가방을 들고 익산역에 내렸다. 대리기사와 인사가 끝나자 내가 물었다. “그 시절의 통학생이면 익산 깡패 맛 좀 보셨어요?” 실수였다. 그때부터 대리기사의 무협 같은 이야기가 시작됐다. ‘목포내기’, ‘족제비 형님’ 등 말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협객들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예전 건달들은 낭만이 있었죠”. “아~ 네…….” 나는 쏟아지는 잠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내가 그에게 말을 붙인 것은 사실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나는 요즘 ‘이리 줄풍류’ 기원에 대해 곰곰하던 참이었다. 정읍은 한때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중심. 정읍의 풍류객들이 교통이 편리한 익산에 옮겨 와서 현재의 이리 줄풍류의 기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절 연휴의 마지막 날, 나는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그의 협객 스토리는 호남선을 타고 광주로, 목포로 다시 대전으로 달려갔다. 그에게 풍류보다 협객의 세계가 더 가까웠다. 그가 한때 발을 담그던 ’협‘의 세계에 대한 끝도 없이 이야기가 이어졌다. 어쩌면 풍류는 협의 세계와 통하는 지도 모른다.


# 도장을 파는 노인과의 만남

국가무형문화재 제83호 이리향제줄풍류 전수조교 임수현 씨(60세)는 정읍이 고향이다. 정읍에서 군 생활을 하며 풍류를 배웠다. 당시 정읍 충렬사 인근에서 초산 율계가 있었다. 임수현은 그곳에서 스승 김환철을 만났다. 정읍풍류의 기원인 율계(律契)를 접한 것은 우연이었으나 이후 그의 운명이 되었다. 군 생활 내내 임수현은 풍류에 빠져 살았다.


해방 직후만 해도 각 지역에는 율계가 있었다. 풍류객들은 풍류방이라는 데서 만나 풍류를 즐겼다. 풍류방은 세속의 번잡함에서 떨어진 조용한 정자거나 시인묵객들을 존중하던 양반집 사랑방이었다. 율객들의 삶은 풍류 그자체였다. 정읍, 익산, 전주, 부안 등에서 바람처럼 모여 풍류를 연주했다. 그러나 산업 근대화의 ’빨리 빨리‘가 재건의 구호가 되면서 시대의 낭만도 사라졌다. 익산에서 풍류가 살아남은 것은 그나마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시대에 불화하던 사람들과, 시대를 초연하던 사람들이 익산에서 율림계(律林契)를 만들었다. 정읍의 풍류객들이 익산에 전통의 선율을 심게 된 이유다.


# 풍류는 세상사를 잊고 여유를 즐기는 호방함을 갈구한다.

이리향제줄풍류는 일제강점기 말 이리시 갈산동 하일환의 사랑방에서 시작했다. 이리율림계(1958-1968)로 공식적으로 등록한 뒤, 이리정악원(1968-1972)와 이리정악회(1972-1987)를 거쳐 현재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허망하고 허망해요. 내가 어쩌다 이것(대금)을 하게 되어 평생 이렇게 사는지요.”


풍류란 말에는 자연을 가까이하는 마음, 멋을 추구하는 기상, 예술에 대한 조예와 기예를 닦는 수련의 자세,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기질이 있어야 했다. 이리향제 줄풍류에는 이러한 호방한 음악성과 잔가락들이 발달해 있다. 그래 경제라 불리는 서울 풍류에는 없는 ’다스름‘을 연주한다. 복잡한 세속의 일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생이 혼연 일체가 되는 음악이 풍류인 것이다.


임수현은 큰 스승들이 하나 둘 사망하자 두려움이 왈칵 몰려왔다. 이리향제줄풍류의 전통을 잘 지켜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의 풍류객들은 매주 연주가 끝나면 식사를 하며 곧잘 여흥을 나누었다. 비가 오면 비에 젖고 날이 좋으면 하늘빛에 젖어 즉석 공연을 했단다. 익산의 사랑방에서 펼쳐진 풍류객들의 연주를 쿠바의 전설적인 뮤지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과 비교해도 될까?


# 빗방울의 추억을 연주하다

“송파 김환철 선생께 배울 때였어요. 스승님이 연주하시는 걸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죠. 예전 풍류객들은 악보 없이 기억으로 연주하셨거든요.” 한 여름날, 정읍시 만수동에 있는 한 제실을 빌려 스승과 합주를 시작했다. 곡이 ‘다스름’에서 ‘상영상’으로 넘어갈 무렵 비가 내렸다. 빗방울이 제실 기와에 부딪혀서 장단이 되었다. 제자의 가슴이 마구 뛰었다.


영화 ‘서편제’에서 어린 소화가 북 치는 연습을 하던 곳이었다. 임수현이 내게 전해준 CD에는 그때 녹음한 연주가 들어있다. 컴퓨터를 켜고 이리줄풍류를 듣는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의 음파가 대금소리의 둥근 음파와 만나고 그 사이를 거문고 가락이 파고든다. 스승 김환철과의 합주에는 빗물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까지 들린다. 지금도 이 연주를 들을 때면 임수현은 스승과의 추억에 가슴이 젖어온다.


“풍류는 똑 같은 악보를 가지고 모두 똑같이 연주하진 않아요. 기본 음계를 바탕으로 지역의 특성에 맞게, 연주하는 그때 당시의 정서를 담는 것이죠. 어쩔 땐 잔가락을 많이 넣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해요. 연주는 당시 기분에 따라서 달라지거든요. 똑 같이 재현하는 것은 기계음이지요.”


국가무형문화재전수관은 배산 공원의 소나무 길로 이어진다. 임수현과 소나무 숲길을 걸으며 풍류 5계명에 대해 물었다. 줄풍류는 자기수양의 음악이라고 했다. 그래서 첫째, 빠르고 요란스럽지 않게 연주하지 말것. 둘째, 교양 없고 속된 사람들 앞에서는 연주하지 않을 것. 셋째, 장터같이 잇속을 따지는 장소에서는 연주하지 말 것. 넷째, 정좌하고 바르게 앉지 않으면 연주하지 말 것. 다섯째 의관을 갖춰 입지 않으면 연주하지 말 것이다. 줄풍류에 대한 얘기를 듣는 것 만으로도 마음을 가라앉는다. 풍류는 자신을 성찰하는 음악인가 보다.


# 외국에서 더 인정받는 이리향제줄풍류

이리향제줄풍류보존회는 해마다 해외 공연 및 정기공연(각 1회)와 시민 대상 공연(10여회)를 진행한다. 외국에선라 호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 임수현등 풍류 이수자들은 내국인 대상 공연이 언제나 고민이다. 요즘 사람들은 옛 사람들의 여유를 잃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느리고 쉬어가는 풍류가 요즘 젊은이의 트랜드와 맞지 않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는 것이 문제다.


“요즘 사람들이 풍류에 재미없어 하는 것을 이해해요. 저도 풍류를 배우면서 진짜 맛을 알기엔 뭔가 부족함을 느꼈거든요. 한 번은 지겨워서 악기를 부서져라 문지방에 일부러 던진 적도 있어요.” 임수현은 빠른 비트의 음악을 선호하는 세대의 유전자 속에는 느리고 평화로운 풍류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분명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요즘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풍류 전수에 주력하고 있다.


임수현과 헤어져서 돌아오며 청파 강낙승이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청파는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매주 열리는 율회에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 스승은 연주 중에도 음악이 안 맞으면 쩌렁쩌렁 지적을 했다. ‘풍류는 욕망에 가득 찬, 자기를 버리는 데서 시작한다.’ 자기수양을 우선으로 생각했던 선비정신이 곧 풍류인 셈이다. 이번 가을에는 더불어 즐기는 풍류의 정신으로 배우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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