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뺏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사람들이 익산에 살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일단 먹고사는 게 가장 중요하다. 아주 오래전, 동굴에 살던 사람들은 경작이 용이한 평야지대로 내려왔을 것이다.
금강과 만경강의 수로는 사람들을 익산으로 모이게 했고 생존을 위한 지혜를 나누면서 고대 문명은 발달했을 것이다. 익산의 창평, 율촌리, 신막, 영등동, 온수리에서는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었고 다송리, 신동리, 평장리에는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땅이 기름지고 먹고살기 좋은 곳으로 사람들이 모이면서 뺏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들의 다툼도 시작되었다.
고대인들은 익산으로 행하는 길목마다 요새를 구축해서 자신의 가족을 지켰다. 그중 가장 강인한 부족들이 금마지역에서 성장했다. 이들을 스스로 ‘건마’라고 지칭했으니 건마국은 인근의 감해국(함라), 여래비리국(여산), 아림국(낭산), 불사분야국(왕궁·봉동)을 비롯한 50여 개 부족과 연맹하여 마한으로 성장한다.
삼한에서 가장 강성했던 마한이라는 이름도 ‘건마국’에서 유래했다. 익산은 수로 교통과 풍부한 자원을 기반으로 고대왕국으로 발전한 것이다.
익산은 가능성의 땅이었다. 고조선 준왕이 익산에 온 것도 이 땅의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었다. 백제의 마지막 불꽃을 무왕이 피울 수 있었던 것도, 고구려 유민 안승이 보덕국을 세운 것도 재기를 꿈꿀 만한 자원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후백제 견훤은 후삼국의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익산의 옛 주인들이 구축한 방어 시설을 정비했다. 그들은 금마의 내부에 도토성과 미륵산성을 쌓았고 외곽에는 낭산산성과 함라산성으로 방비했다.
함열읍 두라마을의 ‘장수바위’ 이야기와 삼기면 궁교(弓橋)마을의 ‘궁터’ 이야기는 장수의 출현과 관련되어 있다. 또 황등면의 대동마을의 옛 이름은 ‘성내’ 혹은 ‘성안’이었는데, 성 안쪽 마을이라는 뜻이어서 금마의 외각지역이 군사적 방어시설로 둘러싸였음을 알 수 있다. 대동마을 인근의 신성마을에는 성터와 ‘말무덤’에 관련된 내용이 채록되었다. 어느 지역이나 말무덤 이야기는 큰 장수의 출현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군물산’이여 군사 군자 물건 물자 ‘군물산’이라는 산이 지금 있어. ‘야막제’하고 ‘군물산’서 뒤로 빠져서 당산 뒤로 넘어가면 ‘깃대배기’라는 데가 있어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얘기하는 고니 또 하나 여그 가서 조금 가면 ‘말무덤’이라는 무덤이 하나 있었는디….”(최준용 33년생, 『익산구술사-황등면 신성마을』 515쪽.)
야간에 적군을 감시하는 진지를 의미하는 ‘야막제’와 군수물자를 보관하는 창고인 ‘군물산’이라는 명칭은 이곳이 과거에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려주는 지명 유래다. 이 일대에 널리 전승되는 독산장군과 흙산장군은 분석하기에 따라서 과거 미인계로 해석될 수 있어서 흥미롭다.
# 선녀는 정말 길을 잘못 든 것일까?
익산시 함열면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두 개 있었으니 독산(돌산)과 흙산이라 불렀다. 독산은 돌이 많았고 흙산은 흙이 많아서 그렇게 불렀다. 독산에는 독산장군이 흙산에는 흙산장군이 지켰다. 두 장군 모두 기운이 세고 용감했다. 혈기왕성한 두 장군은 자주 만나서 술을 마셨는데, 한번 마셨다 하면 사나흘은 꼬박 마시고 놀았다. 절친한 둘 사이가 원수지간이 된 것은 한 여자 때문이다.
어느 여름밤, 한 여자가 독산장군 집에 왔다. 그 여자는 흙산장군과 짝이 되라며 하느님이 보내준 선녀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선녀는 길치였다. 흙산 장군집으로 가야 할 선녀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독산장군 집에 오게 된 것이다. 선녀가 문을 두드렸다.
“여기가 흙산장군님 댁인가요?”
“누구여? 누굴 찾는다고?”
독산 장군은 자다 말고 문을 열었다. 선녀는 무척 예뻤다. 하필이면 예쁘고 길눈이 어두운 선녀가 독산장군 집에 찾아온 것이다. 하필이면 목소리까지 옥구슬 굴러갈 정도로 예쁜 선녀가 다시 말했다.
“혹시…, 흙산장군님이신가요?”
독산장군은 문을 활짝 열었다. 불빛에 드러난 선녀의 용모에 독산장군은 다리가 풀렸다. 하늘하늘한 선녀의 옷자락은 가느다란 팔과 허리를 돋보이게 했다. 하필이면 한여름밤이었다. 슬쩍 비치는 시스루의 선녀 옷이 상남자 독산장군을 얼어붙게 한 것이다. 장군은 그저 ‘어, 어어’ 하고 신음소리를 낼 뿐이었다.
독산장군은 이름처럼 돌이 된 듯했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선녀에게 독산장군은 ‘잘못 찾아오셨소.’란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그저 말문이 막혀 ‘어, 어어’ 반복할 뿐이었다. 선녀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독산장군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선녀의 잠자리를 봐주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일단 하룻밤 재우고 볼 일이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독산장군은 속으로 다짐했다.
‘저 예쁜 색시는 누구에게도 뺏길 수 없다.’ 그가 설령 하느님이라 할지라도.……
‘아닌 밤중에 찾아온’ 선녀와 독산장군은 알콩달콩 참기름 냄새를 진하게 풍기며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소식이 뜸해진 친구를 찾아 흙산장군이 찾아왔다.
“여보게, 독산장군 안에 있는가?”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독산장군은 못 들은 척 나오지 않았다. 선녀에게 자신이 흙산장군이라고 거짓말했던 것이 들통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독산장군은 잠자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친구가 너무도 보고 싶은 흙산장군은 계속 독산장군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독산! 독산! 거기 있는 거 다 알고 있네. 나 흙산장군일세. 어서 나오게.”
선녀는 흙산장군의 목소리를 듣고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 흙산장군 집인 줄 알고 찾아왔는데…’
그녀는 거짓말을 한 독산장군에게 화가 많이 났다. 어쩌면 문 밖에 있는 흙산장군이 잘 생겼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선녀는 문을 열어 흙산장군을 맞이하며 그간의 사실을 고하였다.
“소녀는 하늘에서 흙산 장군에게 보내진 몸이옵니다. 그런데 저 사람이 거짓말을 해서 ……하느님이 맺어주신 장군께 가지 못하고…… 이리되었습니다”
선녀의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를 들으며 흙산장군의 정신은 아득해졌다. 선녀의 미모에 눈이 멀 것 같았고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흙산장군 ‘자신의 것’을 되찾기로 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독산장군도 마찬가지 그도 ‘자신의 여자’를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 사이에는 전쟁밖에 없었다.
독산장군은 독산의 돌을 흙산장군 쪽으로 던졌다. 그러자 흙산장군은 흙산의 흙을 독산장군에게 던졌다. 그렇게 수없는 날들을 서로 자신의 것을 모두 던지며 싸웠다. 그렇게 독산의 돌은 흙산에 쌓이고 흙산의 흙은 독산에 쌓였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가 던진 돌과 흙에 깔려 죽고 말았다. 그 후 선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전설은 원래 이렇게 끝나기 마련이다. 그저 절친이 서로 싸우다 자멸하고 말았다는 교훈만 남을 뿐. 이때부터 독산은 흙산이라 부르고, 흙산은 독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선녀는 정말 길을 잘 못 든 것일까?
함열읍의 ‘장수바위’, ‘궁터’, ‘창뜰’, ‘깃대배기’, ‘투구봉’, ‘말무덤’등의 명칭은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말해 준다. 어쩌면 ‘독산장군 흙산 장군’ 이야기는 미인계였을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난공불락의 요새와 장수들을 한 방에 보내는 저렴한 간계였기 때문이다. 용장으로 유명했던 『삼국지』 ‘여포’와 『성서』의 ‘삼손’을 보내버린 것도 미인계였다. 함열읍의 방어체계를 교란시키기 위해 사용된 미인계가 지금의 전설로 남았을까?
# 보름달이 뜨면 공개 소개팅이 열렸다
어쨌든 함열에 전해지는 이 이야기는 낭만적 전통으로 남았다. 해마다 한가위 밤이면 함열읍 사람들은 독산에서서 달맞이를 했다. 저녁밥을 든든히 먹은 아이들을 앞세우고 추석빔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독산에 올라 한가위 달이 떠오르길 기다리는 것이다. 독산의 산마루는 제법 널찍해서 씨름대회며 장기자랑을 열기 좋았다. 무엇보다 이날은 청춘 남녀의 즉석 만남도 허락되었다. 이른바 ‘함열식 공개 미팅’이다. 독산장군과 흙산장군의 전설이 흐르는 독산에서 사랑의 축제는 여전히 열렸던 것이다.
함열읍의 이 아름다운 전통이 지금은 과거형이다. 청춘남녀의 수줍은 연정이 오고 갔을 바위며 욱자한 씨름대회가 열렸던 독산의 공터는 사라졌다. 그 많던 돌들이 석재로 팔려 버린 것이다. 독산장군의 슬픈 사랑 이야기도 폐석산의 허전한 빈터로 남았다. 익산을 지키던 군사적 요충지이자 낭만의 공간이었던 독산도 함열 어르신들의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한 여름밤의 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