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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당재 Sep 22. 2020

장군의 후예들

익산 기세배놀이 서쪽 마을의 기잡이

익산 <기세배놀이>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꽃무동’이다. 풍물 장단이 휘몰아치면 무동을 태운 아이들이 깜찍한 율동으로 흥을 돋운다. 나는 색동옷을 입은 아이들의 손 사위가 바람에 한숨 쉬는 꽃잎 같고, 고치에서 갓 나온 나비의 날갯짓 같다. 그래서 나는 ‘꽃무동’ 보는 것을 일사불란한 진을 펼치는 풍물패의 판굿 보다, 거대한 깃발을 아슬아슬하게 돌리는 기 놀음 보다 더 좋아한다.


어린아이를 꽃으로 피워 올린 ‘꽃무동’이라는 상상 때문이다. 어른의 어깨 위에 앉은 아이가 꽃이라면 무등을 받치는 어른은 꽃받침이자 꽃대이며 뿌리일 것이다. 아이는 꽃의 미래인 열매를 꿈꾸는 징표다. 익산의 미래를 꿈꾸었던 기세배 꽃무동의 기원을 찾아보자.     


# 쌈터에서 쌈 하고 욕골에서 욕먹고 항복골에서 항복했다

익산은 해양 디아스포라의 정착지이자 희망의 땅이었다. 고조선 준왕의 남천, 백제 무왕의 천도는 모두 발달된 수로 교통로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익산 곳곳에는 수로와 관련한 지명이 유독 많다. 금강과 만경강의 수운은 내륙 깊숙한 지역까지 연결되었는데, 필자의 조사한 결과 금강 유역은 미륵사로 연결되었고, 만경강 유역은 왕궁리 유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왕궁유적지 앞까지 바닷물이 유입되어 왕궁면에 섬이 있었다는 지명유래도 다수 채록된다.     


 《삼국유사》에는 “(미륵사는) 산을 등지고 물에 임했으며 꽃나무가 수려하여 사시의 아름다움을 구비하였다. 왕은 항상 배를 타고 물을 따라 절에 가서 그 경치의 장려함을 구경하였다.”라고 전한다. 즉 미륵사까지 수로가 연결되어서 무왕이 배를 타고 왕래했다. 지금의 지형으로 보면 믿기지 않은 일이나, 이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익산천이 안 생기기 전에는 여그가 바다였었디야 근디 인자 여그서 ‘쌍정리’라는 동네를 갈려면 배를 타고 댕겼어…”(춘포면 담월마을 최한규 1936년생)     


 “이 근처가 다 바다였었는디 물이 줄다가 보니까 모래가 돼서 그리 물결이 쳐서 모여가지고 산이 되얐디야. 욕골 옆에 쌈 터가 있더구먼. 그래갔고 전쟁했다대. 요 근방 미륵산이 바다였고” (금마면 구룡마을 소순주 1938년생)     


금마면과 춘포면에서 예전에 바다였다는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채록되었다. 예전 사람들이 밀물이 들어오는 강을 모두 바다라 불렀다는 것을 감안하면, 금강과 만경강으로 통해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미륵산 근처인 사자암 아래에서 일종의 수전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야기인즉 ‘용의 형상을 한 산등성이(용물안)가 있는데 (왕의) 전투선들이 후퇴하며 이곳을 지나가다 산허리를 끊고 지나가면서 현재의 허리가 잘려 있는 모습이 남았다는 것’이다. 미륵산 아래까지 큰 배가 오고 갔다는 이야기는 기준왕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때 미륵산 인근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항복골은 미륵산 기준성 넘어서 있어요.…… 그런데 바위가 있는 곳은 성을 안 쌓았는데, 그쪽으로 적이 올라 와서 졌다고 합니다. 미륵산 장군봉 밑이 그 자리입니다. 그때 패하니, 준암바위에 잡혀서 항복을 하라며 주리를 틀렸다 합니다. 그리고 항복골 가서 항복을 했다 합니다. 거기에 (준왕의 군사들이 붙잡혀 맞았다는) ‘맞은 바위’도 있습니다.… 망을 봤다 해서 망골, 망실이 있으며, 징을 쳤다고 해서 징골이 있습니다.”(구룡마을 이우선, 1929년생)     


 “병사들이 와서 ‘당제’에서 당하고 요리 내려와서 인자 비가 안 오면 무제봉에서 무제 지내는 하는데서 내려와서 ‘당제’에서 당하고 ‘욕골’에서 욕하고, 닭 잡아서 ‘닭내갈’이라는 데서 닭을 잡아서 국을 끓여먹고 독점(진골)에 와서 독을 부셨데요.”(구룡마을 이자응, 1943년생)      


“지금도 망골에 가면 깃대를 꼽던 동그란 자국이 있습니다.”(구룡마을 홍응식, 1949년생),      


구룡마을 일대에서 전하는 ‘미륵산 전쟁담’은 금마를 둘러싼 산성의 의미와 금마(왕도)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정리하면 1) 과거에 미륵산 근처에서 큰 전쟁이 벌어졌다. 2) 미륵산에 주둔한 준왕의 군대가 적의 기습을 당해서 준암바위 근처에서 패전했다. 3) 구룡마을 인근에는 ‘망골’, ‘진골’, ‘기따배기’, ‘항복골’ 등 전쟁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항복골’은 지금의 서동공원 부근을 일컫는 지명이다. 이름 그대로 전쟁이 끝난 지역이다.     


이 이야기는 구술자에 따라 전쟁에서 진 쪽이 기준왕이 되기도 하고, 백제의 장수가 되기도 한다. 민담 특성상 ‘견훤과 왕건의 전투’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한다. 민중들은 대표성을 띤 인물로 역사적 사건을 수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미륵산 전쟁담’은 인근의 누동, 옥동, 황각 마을에서도 채록되었다. 정말  미륵산에서 한 나라의 명운을 건 전투가 벌어진 것일까?      


# 대대로 장사가 태어난 장사마을 


금마면 용순리는 미륵산에서 내려다본 마을의 형태가 용의 입술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용순리 아래쪽에는 기준왕이 쌓았다는 익산토성이 있다. 과거에 금마면의 큰 무당이  ‘용순리’에 있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금마면에서도 제법 큰 마을에 속했다. 이곳 용순리에서도 동편마을은 대대로 힘이 센 장사가 많이 나오는 곳이다.     


동편마을이 장사마을로 불리게 된 것은 ‘용의 기운’ 덕분이다. 동편마을이 자리한 금마면 용순리는 풍수적으로 ‘용이 누운’ 형태인데, 동편마을은 ‘용의 배’에 위치한다. 전설에 의하면 동편마을의 '돌팍제'라고 불리는 곳에 용이 승천하려다 못하고 알을 낳았고 쓰러졌는데, 그 용의 형태로 용순리가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돌팍제' 근처에 있는 큰 바위들은 그때 낳은 ‘용의 알’이라 한다.


재미있는 것은 동편마을이 ‘쌍둥이 촌’이 된 것도 ‘용의 기운’이라고 동편마을 주민들은 믿고 있다. 실제로 필자가 직접 만나 본 구술자 가족을 비롯하여 쌍둥이 가족이 10여 호에 헤아린다. 공교롭게도 쌍둥이를 낳은 사람들은 돌팍제 인근에 살면서 ‘샴너머’라 불리는 샘물을 마셨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 정도면 현대 과학의 생물학적 상식을 넘어선다. 돌팍제는 예전에 산제당이 있던 곳이다.     


# 기잡이들은 장군의 후손이었나?


익산 기세배놀이는 정월 세배 절기를 맞이하여 12개 마을의 농군들이 기세배를 하고, 풍물과 기놀이 등을 즐기며 한 해 풍년을 기원하는 놀이다. 공수부대를 기준으로 동편과 서편 마을로 나뉜다. 용순리 동편마을은 금마면 서편의 으뜸마을이어서 기세배에서 다른 마을의 세배를 먼저 받았다. ‘돌팍제 물 먹은 장사’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마을의 세력을 자랑하는 것으로 용력만 한 것이 없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산제당을 모신 큰 무당이 있었을 정도로 마을의 세가 컸기 때문일 것이다. 무거운 농기를 자유자재로 돌리는 기잡이가 대대로 나오는 동편 마을을 필자는 장군의 혈통이 전해지는 마을이라고 상상한다.        


동서양 문화의 특징을 만들어내는 것은 기후가 만든 농사 형태다. 비가 많이 오는 몬순 지대에 위치한 아시아는 갑자기 불어나는 강물을 다스려야 하기에 대규모 노동인력의 협동이 필요했다. 또한 작물의 선택도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벼농사를 지었기에 역시 두레 등 협력시스템을 고안하여 집단 노동을 하였다. 예컨대 지형과 기후가 지역의 문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아시아 도작 문화권은 타문화권에 비해 관계성이 발달했다. 도작 문화권 공동체가 보이는 일사 분란함은 수해나 전쟁과 같은 유사시에 집단 동원체제를 가능케 했다. 서열과 절차와 집단성이 강조되는 기세배놀이의 특징이 여기서 발휘된다. 


이렇듯 특정 지역의 민속놀이는 그 지역의 문화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익산 지게 목발 놀이가 수렁논이 많아 농사짓기 힘든 삼기면 검지마을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면 기세배 놀이는 넓은 토지에서 집단노동을 선택하여 높은 효율을 나누고자 했던 지역의 문화적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제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게 된 것은 삼한시대부터 잘 조직된 지역의 공동체성에 기인했을 것이다. 필자는 2019년 동편마을 취재 시에 돌다리 근처에서 ‘말무덤’이라 불리는 지명유래를 발견했다. 말무덤은 어느 지역이나 장군의 출현과 관련한 의미 있는 지명이다. 주민들은 동편마을 아래쪽으로 흐르는 개천을 통해 과거 황등호까지 배를 타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래서 마을 논을 파면 ‘배편 조각’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동편마을 사람들은 무왕을 호위하던 장군의 후손이 아닐까? 하는 상상력이 구체화되는 순간이다.      


# 미륵사지의 빈 공간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나


세계문화유산 미륵사지에 볼 것이 없다고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무언가 채워 넣어야 안정감을 느끼거나 거대한 무언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야 직성이 풀리는 습성을 가졌을 수 있다. 그러나 대도시의 한 복판에는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고, 너무나 거대한 존재 앞에 서면 우리는 더욱 왜소해진다. 개인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존재는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거대한 무언가를 찾는 이들은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무력감과 허무함을 내세울만한 다른 것을 찾아 의지하는 것으로 달래려는지도 모른다.      

빈 공간은 심심하다. 그러나 그 비어있는 공간이 있어 무언가를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나는 동편마을 표지석을 보며 장군의 후예들을 상상하고, 미륵사지의 빈터를 보며 일직선으로 배열된 3원 3 탑의 비례미를 상상한다. 그리고 3개의 금당 아래에 존재했을 지하 공간에 대해 생각한다.       


미륵사지에서 비움의 메시지를 배워보는 것은 어떨까? 선비들의 술잔에 일부러 구멍을 뚫어서 취하는 것을 경계한 것도 우리 선조들이 전하는 비움의 정신이다. 어쩌면 미륵사지는 비워져 있으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완성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사라진 촛감나무가 흉년의 마을 사람들을 다 먹여 살렸다는 이야기가 여전히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라고 있듯이, 나무가 있던 빈자리가 마을 사람들의 삶을 채우고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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