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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당재 Oct 30. 2020

삶이 고달플 땐, 소리 한 자락

윤흥길 <에미>

◈ 연동리 석불좌상

익산은 담백한 충청문화와 질박한 전라도 문화가 골고루 버무려진 문화의 경계지다. 기차가 지나는 걸 보면서 떠나고 싶은 마음과 거주의 욕망 사이에서 한 번쯤 갈등한다. 기차는 근대 이후 익산의 명물이기 때문이다. 환절기면 습지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마을에 스민다. 자욱한 안개를 뚫고 하행선 기차가 남쪽 항구에서 상경하는 기차를 만나면 긴 기적소리를 내지른다.

익산은 유동 인구가 거주 인구보다 많은 바람의 고장. 새로운 것이면 무엇이든 익산을 거쳐 지나간다. 호남의 관문, 익산은 시대의 맞바람을 정면에서 받아냈다.


내게 익산의 소설을 한 편만 꼽으라면 윤흥길의 『에미』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익산을 격동의 근대사를 한 여인의 삶으로 오롯이 담아냈다. 그녀가 바람의 고장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달플 때마다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는 노래 덕분이다. 민중의 노래. 이것을 민요라 부른다. 소설은 격동기 여인의 삶을 통해 익산의 민요가 어떻게 전승했는지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삼기면에서 시작한다. 수렁논이 많아서 농사짓기 힘든 곳. 도 무형문화재 1호인 <익산목발노래>를 탄생시킨 곳. 삼기농요가 전승되는 곳이다.


삼기면 연동리 석불사거리에는 아침, 저녁으로 안개가 낀다. “황등을 벌써 지나 삼기면의 경계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어림짐작으로 율촌리와 서두리의 중간쯤에 해당되는 듯했다. 이제 야트막한 언덕 하나만 넘고 나면 길가에 작은 연방죽이 툭 불거질 것이고, 그 연방죽 바로 옆에 외딴 주막집이 있을 것이다.”(이하 인용문, 윤흥길의 소설 『에미』)

보물 제 45호로 지정된 석불이 있는 사거리의 이름이 석불사거리다. 백제 시대 석불이다. 백제 미술 특유의 부드러운 곡선이 단단하기로 소문한 화강암에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일곱 구의 화불이 조각된 거대한 광배는 전국에서 손꼽힌다. 이 정도 석불을 모시려면 과거 절의 규모도 상당했을 것이다. 안정감 있고 아름다운 몸체에 비해 불두는 해학적이다. 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에서 안개에 갇혀 꼼짝할 수 없다. 왜장이 점을 쳐보니 석불의 조화라 했다. 왜장이 석불의 머리를 잘라 버리자 비로소 안개가 걷혔다. 세상의 전설에는 안타까움이 반영되어 있다. 원광대 박물관의 안여진 선생에 의하면 연동리 석불은 규모 면이나 미학적인 측면에서 우리나라 최상급 작품이라 한다.


소설 『에미』에서 아들이 ‘일류 중학교’에 합격하게 해 달라고 어머니가 불공을 드린 곳이 바로 이 ‘연동리 석불’이다. 우리 선조들은 무슨 일이 있든지 비손이를 하였다. 종교에 의탁하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일. 바람을 바람으로 견디고자 하는 마음. 포기하지 않고 살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래서일까? 석불사거리의 몇 안 되는 가게들은 모두 석불의 이름을 받았다. 석불회관, 석불카센터, 석불상회, 석불슈퍼, 석불통닭, 석불사 곁 학교도 석불초등학교다.


◈ 연방죽과 자귀나무

윤흥길은 『에미』에서 익산 삼기의 한 여인에게서 격동의 한국사를 본다. 여인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는다. 의지할 데 없는 이들에게 남은 것은 비손이다. 그녀는 어린 아들과 전쟁을 피해 춘포면으로 피난을 간다. 춘포면은 소설가 윤흥길이 초등학교 교사로 첫 근무를 했던 곳. 전주와 익산을 잇는 길목이었다. 춘포와 금산사를 왕래하던 에미는 폭격의 와중에 겁탈을 당하고 무능한 남편에게 버림까지 받게 된다.

소설가 윤흥길이 그려낸 ‘에미’는 고난을 견뎌온 민중의 전형이다. 에미들은 자신의 한을 노래로 달랜다. 한의 노래가 곧 민요가 된 것이다. 삶의 스산함에 지친 에미가 정신을 잃었다가 돌아오게 된 것도 노래와 춤 덕분이었다. 에미의 ‘자연발생적 예술행위’의 배경이 된 것은 자귀나무의 개화다. 미륵산에는 자귀나무가 많다. 여름이면 꽃이 피는 자귀나무는 합환목이라고도 불린다. 연분홍 자주색 꽃이 우산처럼 퍼져 있다. 특유의 모양과 냄새가 남녀의 화합을 돕는다는 속설이 있다. 민간에서는 말린 자귀나무 꽃을 베개 속에 넣기도 한다.


“마침내 어머니는 장군봉 꼭대기 조금 못 미처에서 흐드러지게 분홍꽃이 만발한 자귀나무숲의 장관에 접하게 되자 이야아!하고 느닷없이 괴성을 지렀다. …… 그야말로 광란의 무도였다. 격렬한 동작으로 말미암아 옷고름이 풀어져서 저고리 앞섭이 빤히 열려 있었다. …… 어머니의 몸뚱이 전체가 어느새 커다란 분홍꽃으로 화하여 미친 듯이 훌쩍훌쩍 공중에 솟구치는가 하면 또 팽이처럼 빙글빙글 맴돌이를 하는 중이었다.”


에미는 춤과 노래를 통해 자신의 한을 치유한다. 그리고 저수지를 찾는다. 상징적인 의식이다. 에미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저수지에 가서 ‘정화’한다. 아들에게 보라고 증인을 세운 것이다. 저수지는 생명의 근원.민중들은 저수지의 물을 끌어들여 자식을 먹였다. 호란 때 중국인에게 잡혀갔던 마을의 여인들이 돌아오자 가문의 명예 때문에 자결을 요구받은 곳도 저수지였다. 그녀들은 ‘남성들의 합의에 따라’ 기일을 정해 하반신을 물에 담그는 ‘정화의식’을 해야 했다.


◈ 민요, 민중의 한을 달랜다.

민요는 일상의 바람을 부른다. 그래서 ‘한숨에서 시작하여 한숨으로’ 끝난다. “산천초목에 붙는 불은 / 세우라도 끄지마는/ 이내 가슴 타는 불은 / 억수가 와도 아니 꺼지리”


소설에서 ‘에미’가 부르던 이 노래는 삼기농요다. 길쌈을 하거나 물레를 돌리면서 불렀다. 민요는 노동요의 성격을 띠며 입과 귀를 거쳐 전해졌다. 누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닌 핏줄로 전하는 것이 민요였던 것이다. 윤흥길의 소설에서도 잠이 덜 깬 화자의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유전자 속에 각인되어 자연스럽게 흘르는 것이다. 소설의 결말에서 ‘춘계영감’이 농요를 선창하자 까까머리가 복창하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익산의 노래와 춤은 이렇게 전수되었다.


익산에는 여인네들이 부르는 부요(婦謠)가 많이 전승됐다. “험난시런 시국 만나서 나라 지대로 못 지키고 가정 하나 못 건사헌 남자들은 대개 못난이가 될 수“X이 없다. 못난 남자들이 저 못난 부애풀이로 집적거리기 십상인 것이 바로 여자다. 여자만침 맨맛헌 상대가 없기 땜시 그런다.” 병상의 여동생과 화해를 하기 위해 오빠는 삼십년 만에 찾아온다. 그가 겪었던 30년의 ‘한’은 에미가 여인임을 잊고 살아야 했던 인고의 시절이기도 했다. 민요는 이 땅의 여인들이 풀어내는 노래, 가람 이병기는 강연 도중에 민요를 자주 인용했다. 어릴 때부터 들었던 민요에 숨은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머니들의 한의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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