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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당재 Oct 30. 2020

익산의 소리꾼들

# 어디서나 가락을 흘러나왔다

명창 김유앵이 어렸을 때의 일이다. 이사를 한 곳이 하필 익산권번 앞집이었다. 지금의 익산국악원이 있던 곳에 자리한 권번에서는 촛불처럼 일제강점기 예술의 불꽃이 타올랐다. 권번은 시조와 잡가, 민요는 물론 춤과 기예를 가르치는 일종의 예술학교였다. 국권이 상실되자 일종의 기생조합이 생긴 것. 김유앵은 권번 마당에서 놀면서 자연스럽게 방에서 흘러나오던 소리를 흥얼거렸다. 우연히 그 소리를 들은 권번 선생이 ‘소리는 네가 해야겠다.’고 할 정도였다. 권번에서 정식으로 수련을 받게 된 김유앵은 연기면 연기, 춤이면 춤, 못하는 게 없는 종합예술인으로 성장했다.


명창 최승희도 우연히 국악에 입문한 경우다. 길을 걷다가 담 넘어 들리는 소리가 그저 좋았다. 그 가락을 따라 가보니 고운 옷을 입은 여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최승희는 여자의 자태와 애달픈 소리에 감전이 된 듯 했다. 그날부터 최승희는 아버지 몰래 소리를 배웠다. 딸이 권번에 다니는 걸 안 아버지가 죽기를 각오하고 반대를 했으나, 최승희는 소리가 목숨과 바꿀 만큼 좋았다. 소리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던 ‘한’ 많은 시절이었다. 권번은 소리와 기예를 배울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장소였다.


일제강점기 예능의 수요가 있는 큰 도시면 권번이 생겼다. 전주·익산·군산·정읍에 생긴 권번에는 당대 예술가들이 과목별로 소리와 기예를 가르쳤다. 예술교육이 세습 중심의 가문 전승에서 학원 형태의 교육으로 점차 변하게 된 것이다. 마치 프랑스 왕정이 무너지자 왕실에서 요리를 하던 수백 명의 요리사들이 거리로 나와 음식점을 차린 것이 현대 레스토랑의 시초가 된 것처럼. 전문 예술인들도 권번에서 배운 소리로 대중에게 자신의 브랜드를 알려야 했다. 예술의 길은 가난하고 높고 힘들어졌다.


#소리보다 사람이 먼저 되어야

기생은 웃음을 파는 접대부가 아니었다. 한때 국가와 관아에 소속된 별정직 공무원이었다. 하층 계급이었지만 궁중에서도 예술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이 기생이었다. 기생의 관리는 교방에서 담당했는데 우리 지역에서는 전주, 무주, 순창 등지에 있었다. <춘향전>에서 남원 수령인 변사또가 ‘기생점고’를 요구했던 것으로 보아 남원에도 기생이 거주했을 것이다.


나라가 망하고 관기제도가 사라지자 기생들도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야만 했다. 최초의 기생조합이 경성에서 조직된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가 있던 1909년이었다. 일제강점기 권번에서는 전통 문화예술은 맥을 이었다. 익산 출신 명창 정정렬도 권번의 소리선생이 되어 생활을 영위했다. 권번은 종합예술교육공간이었고 예술가들에겐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직장이었다. 기생들은 권번에서 예술교육을 통해 사회화 되었다.

일제강점기 기생은 권번에서 단순 기예의 습득이 아닌 ‘자기 수련’으로서의 예술을 배웠다. 구한말 국채보상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이들도 권번의 기생들이었다. 성리학적 예술관을 가졌던 그들은 나라가 망하는 것은 곧 정신이 망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국채보상운동에 평생 모은 귀중품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한성기생조합이 결성되자 원각사에서 <경성고아원> 경비마련을 위한 자선연주회를 연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기생들은 ‘요릿집’으로 출장 공연을 갔는데 그곳에서 나라를 파는데 동조한 양반을 만나면 호통 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참여한 여성 중에는 ‘유관순 누나’처럼 여학생도 있었지만 기생과 전도부인들이 많았다. 특히 기생조합은 시위 대열의 앞에 섰다. 그녀들은 금비녀·금반지를 팔아 광목을 구입해 만든 소복차림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러서 소강상태에 빠진 시위대에게 활력을 주었다. 권번 출신 기생들이 우리 문화를 전승하면서 사회운동에 앞장 선 일제에게 눈엣가시였다. 일제는 기생을 창기 취급을 하며 성병검사를 강제하는 등 권번 기생들의 자존감을 약화시키려 했다.


허무주의에 젖어 요릿집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독립사상을 일깨워주는 것도 기생들이었다. 그녀들은 일종의 의식화 교육을 한 것이다. 그래서 ‘화류계에 출입하는 조선 청년치고 불온한 사상을 가지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다.’ 일제의 치안 책임자인 ‘지바 료’는 기생이 “화류계 여자라기보다 독립투사였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일제는 권번을 점차 폐쇄시켰다. 권번을 통해 전승되던 우리 전통음악도 알음알음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미륵산 심곡사는 소리 공부하기 좋은 곳이다. 인가가 없는 산중에서는 오로지 자신의 소리를 찾는 데 주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곡사라는 이름도 미륵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앉은 절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심곡(深谷). 명창 정정렬도 심곡사에서 떡목의 한계를 극복하고 득음을 했다.

웅포의 숭림사도 소리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강을 옆에 둔 천년고찰의 풍광이 좋았고, 무엇보다 인근 함라에는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삼부자집이 있었다. 명창 임방울을 비롯한 수많은 명창들이 숭림사를 다녀갔다. 소리꾼들이 공부 장소로 절을 선호한 것은 무엇보다도 숙식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소리꾼들은 양식이 떨어지면 소리채를 얻으러 산을 넘어 가서 자신의 예술을 양식으로 바꿔서 돌아오곤 했을 것이다.

예술가들의 음악을 이해하고 들어주었던 수준 높은 애호가들이 있었기에 익산에서 예술혼을 키운 명창들은 이후 국악의 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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