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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당재 Aug 17. 2020

동물들의 나이 자랑

백제의 예비군훈련, 익산 기세배 놀이

# 음식상을 제일 먼저 받는다는 것

전래 동화 중에 첫째가 되기 위한 동물들의 얘기가 있다. 옛날 한 곳에 살던 사슴, 토끼, 두꺼비가 잔치에서 상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누가 먼저 상을 받는 가'를 두고 논란이 시작됐다. 이럴 땐 나이가 많은 사람이 우선이다.(‘민증 깐다’는 속어가 여기서 기원했을까?)      


사슴이 말했다. ‘예전에 천지개벽할 때 하늘의 별을 박는 일을 내가 거들어 줬다.’ 토끼가 말했다. ‘나는 사슴이 별 박으러 하늘로 올라갈 때 쓴 사다리를 만든 나무를 심었다.’ 마지막으로 두꺼비가 갑자기 훌쩍훌쩍 울었다. ‘내게는 자식 셋이 있는데, 큰 애는 하늘에 별을 박을 때 쓴 망치 자루를 만들고, 둘째는 은하수를 팔 때 쓴 삽자루를 만들고, 셋째는 해와 달을 박을 망치 자루를 만들어 일했는데, 그 일을 하고서 모두 죽고 말았다. 너희들의 말을 들으니 죽은 자식 생각이 나서 운다.’ 두꺼비의 말이 끝나자 제일 연장자로 판정되어 첫 상을 받게 되었다.      


요즘처럼 효율성을 따지는 시대에는 이해가 안 될 이야기다. 배식된 음식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서열을 중시하는 문화는 한국인의 식습관에 아직도 남아있다. 그래서 뜨거운 국밥을 서열에 따라 부산하게 옮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동물들의 나이 자랑 얘기는 곧 서열 문화를 반영한 경쟁담인 것이다. 그래서 아예 쟁장설화(爭長說話)라는 분야가 있을 정도다. 익산의 민속놀이에도 서열을 정하는 것이 중요한 풍속이 있다. 기세배놀이가 그것이다.    

      

# 새해에는 농기도 세배를 했다     

기세배는 주로 평야지대인 금마, 왕궁, 삼기 등 에서 정월에 풍물을 치면서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민속놀이다. 일명 ‘농기 세배’라 불린다. 설날에 사람들이 세배를 하는 것처럼 마을 농기들이 서로 절하는 것 같은 모습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세배놀이는 익산시 금마면과 왕궁면을 중심으로 민속놀이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됐다. 정월대보름을 전후로 농기세배제전(農旗歲拜祭典)을 열었다.      


 기세배 놀이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서열 정하기다. ‘절을 누가 먼저 받느냐’는 것으로 마을끼리 실랑이를 벌인다. 인사를 먼저 받는다는 것은 서열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세배놀이에 포함된 정치적 함의다.     

사회 심리학적 측면에서도 기세배놀이는 흥미롭다. 맏형 마을은 고정되었으나 그다음 서열을 정하는 데서 신경전을 벌인다. 요즘엔 실랑이를 하는 흉내를 내는 것으로 끝내지만 예전엔 드잡이를 하며 완력이 등장하기도 했다. 남들에겐 2등이나 3등이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당사자들은 다른 법. 자신의 자식들이 다른 마을 아이들에게 기가 죽지 않기 위해선 마을 기를 먼저 숙이면 안 됐다.          


# 마한의 솟대 신앙에서 유래한 풍속     

정월이 되면 익산의 여러 마을에서는 농기를 앞세우고 마을의 안녕과 협동정신을 키우기 위해 기제사와 기세배, 기놀이를 했다. 이때 기세배놀이의 중심에 위치한 농기를 ‘하늘님’이라고 불렀다. 이 농기를 이동식 솟대’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견해를 근거로 기세배놀이의 기원을 마한시대로 삼기도 한다.     

마한은 소도(蘇塗), 솟대(大木), 솟터라는 별읍의 성지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달고 귀신을 섬겼으며, 천군이 제사를 주관했다. 이 농기의 가장 꼭대기인 우듬지에는 솟대처럼 꿩 꼬리 깃을 꽂고 방울을 달았다. 방울과 북은 '신의 강림'을 부르는 신물이다. 마한의 후예들은 신물이 울리면 농악을 울려 호응하며 고대국가부터 이어진 축제를 벌였던 것이다.      


한편 기세배 놀이에서는 고대 군사 훈련의 자취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삼국시대의 군제에서는 유사시에 영기를 들고 풍물을 쳐서 징집 신호를 알렸다. 즉 군기를 필두로 군사훈련을 했던 고대 군사훈련처럼 기세배 놀이에서는 농기를 매개로 좌상(지휘자), 공인, 조수 머슴, 총각 좌상, 사령, 기받이, 풍물잡이 등을 배치하고 좌상의 명에 의해 사령이 영을 집행했다. 고대의 제천행사에서 시작된 이 풍속이 유사시에는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예비군 훈련이 되었고, 평화시에는 마을(공동체)의 안녕과 협동정신을 키우는 것으로 점차 변모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익산의 동부지역인 금마면, 왕궁면, 여산면 일대에는 기세배놀이를 하는 전승되며, 익산의 서부지역인 함라면의 기세배에는 농기 뺏기 형태로 전승되고 있어서 이러한 차이가 지역적 특색인지, 시대적 변화인지 궁금하다.          


# 기세배는 백제 무왕의 군사훈련이었을까?         

기세배의 시작은 ‘기제사’다. 정월 열 나흗날 밤에 각 마을마다 모시는 당산에 농기를 세워놓고 각자 풍년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기제사가 끝나면 정월 대보름이 되는 다음날 농기 세배 대전이 벌어졌다. 익산 기세배는 원래 12개 마을이 참가했다. 그래서 11개의 아우 마을이 차례로 선생 마을을 찾아가 세배를 했다. 이때 소동기가 농기들을 안내하며 선생 마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최근엔 6개의 마을로 축소되어 놀이를 펼쳤다.     

기제사가 끝나면 ‘연행 인솔’을 한다. 연행 인솔에 참가한 농기들은 마치 잘 훈련된 군대의 분열처럼 일사불란한 진법을 다양하게 펼쳤다. 상대마을의 용기를 선두로 마을기, 농악대, 좌상, 무동 등이 입장한다. 이때 길에서 ‘길 굿’을 치면서 각 마을별로 입장해서 큰 원형의 대형을 형성하며 인사굿을 친다. 인사굿이 끝난 뒤에 큰형 마을은 중앙으로 들어가고 각 마을별로 원형을 이루며 놀이마당을 연다.      


놀이마당에서의 가락이 자진모리와 휘모리로 넘어가는 절정에 오르면 기수들이 중앙에 모이고 연주자들이 기 사이를 누비며 농악을 치는 퍼포먼스가 벌어진다. 이것을 멍석말이 대형이라 한다. 마을별 놀이가 끝난 뒤에야 잡색들이 술상을 차리고 안주를 준비한 다음 기세배가 진행된다. 기세배가 끝나면 마을에서는 무동놀이, 씨름놀이, 소고놀이, 설장구놀이, 기 돌리기를 하면서 여흥을 북돋았다. 군사훈련이 끝나면 잔치가 벌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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