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한 이런저런 느낌들…
다시 돌아온 숲은 여전하다. 앞의 산마루 전망을 가린다고 자른 놈은 넘어지다 옆 동료 나무에 기대어 비스듬히 넘어진 채로 그렇게 여전히 버티고 서있다. 인간의 욕심에서 자를 놈, 남겨 둘 놈, 잣대로 정하는 건가? 숲을 가꾼다는 명목하에 인간의 인위적인 잣대로 자연에 대한 독재자의 횡포를 부리는 것인가? 나도?
숲으로 돌아오면서 또 한 번 세상에 대한 고뇌를 해본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욕심에서 비롯된 것일까? 평등과 존중에 대한 관념이 인간에게만 머무르야 하나? 세상 만물에 대해 똑같은 기준으로 보아야 하나? 말없이 그냥 처분만 기다리는 나무와 잡초들.. 그것까지도 내가 고뇌해야 하나?
나의 60 하고도 몇 년을 더한 삶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아직도 삶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헤매는 할아버지 입문자 60대 내가 한심스럽다.
해먹에 누워 하늘을 본다. 적당한 흔들거림과 안락하게 몸을 감사는 평온함이 좋다. 맑고 푸른 하늘이 좋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푸른 잎들을 품은 우뚝 쏟은 위용의 나무가 당당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오수에 빠지면 더없이 좋다.
그렇지만 그 평안함의 뒤에는 한정된 세상만 보는 답답함이 있다. 단지 해먹을 걸어둔 두 그루의 나무, 그 나무 사이로 보이는 좁디좁은 하늘, 보이는 세상은 단지 그것뿐이다.
그렇게 숲에서 새삼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이치는 동전의 양면처럼, 지킬 박사처럼 이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노동의 뒤에는 늘 푸짐한 먹을거리와 한잔의 술! 그것을 빼고는 인생을 논할 수 없다! 혼자서 그냥저냥 조금씩 하는 일이지만 스스로 엄청난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게으름을 피웠던, 부지런히 일을 했던, 아무튼 혼자 자의적으로 일의 가치를 정하고 스스로 일의 댓가에 상응하는 보상을 만들고, 한잔의 술로 노동의 댓가를 자축한다. 살아가는 삶이 그렇고 그런 것 아니겠나? 이제 60대 중반을 향해 달리는 나이! 아무리 100세 시대라고 부르짖지만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일까? 삶의 반환점을 넘어선 지금, 나는 내 인생의 황금기를 만들기 위해 부딪히고, 그리고 하소연하고 눈물 짜내면서 나를 항변하고 있다.
숲이 있어 , 나가 꿈꾸고 가꾸어야 할 숲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그 숲에서 나는 내 스스로 넋두리하고, 나의 앞으로의 삶에 대한 꿈을 꾸고, 그것 만으로도 나는 행복해질 수 있다.
해질 무렵의 세상은 늘 평온함을 동반한다. 은은히 흐르는 음악과 나무 틈사이로 여운처럼 남겨진 햇살!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감상에 빠진 60대 철 모르는 할아버지! 이런 완벽한 조합이 없지 아니한가? 내 의지가 확실할 때, 그리고 내 사지가 나의 통제하에 있을 때, 내 스스로 삶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을 때 나는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 이곳에서 이렇게 존재한다!
누군가가 이야기했던가? ’ 인생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라고! ‘ 그래도 바람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