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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샤 Jan 05. 2022

패싱 passing

'나'로 존재하는 것 



#패싱 #넬라 라슨


재밌어.


정말 오랜만에 그 자리에서 읽은 책이다.

끊지 않고 흡수하듯이 본 게 얼마만인지.


1920년대의 책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하얀 피부를 타고난 흑인이 백인 흉내를 내는 것.

패싱.


이 책은 근본적인 문제를 던진다.

인종이 피부색만으로 결정이 되는 가. 

그리고 주류에 속하려는 열망을 가장 간단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모습을 바꿈으로써, 아니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누가 클레어를 탓할 수 있겠나.


클레어가 계속해서 보여주는 

억압된 분노와 냉소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분노하면서도 내려놓지 못하는 백인의 삶을 살고자 하는 자신과

검둥이라고 비하하면서도 자신의 아내가 검둥이임을 알지 못하는 

남편이 얼마나 웃겼을까.


그녀는 상당히 병적인 모습을 보여줬는데, 

어쩌면 경계에 있는 자들이 갖게 되는 모습을 잘 드러낸 것이 아닌가 싶다. 


아이린. 

아, 순진한 아이린은 같은 인종을 버리지 못하고

가련한 죄책감으로 불쾌감과 짜증을 느끼면서도 

외롭다는 클레어를 받아들였다.

같은 인종인 그녀를 자신과 다른 사람으로 보지 못했기에.


안정성을 추구하는 그녀였기에,

떠나고자 하는 남편인 브라이언과의 갈등 속에서도 

기어코 미국에 머물렀다.


남편이 클레어에게 마음이 있음을 깨달아도 

현재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묵인하면서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얼마나 잘 표현했는지.


이렇게 날카롭도록 솔직한 책은 정말로 

오랜만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서 욕을 먹기는 싫지만,

그것을 드러내며 위험을 감수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클레어들의 조롱, 경멸과 함께하는 경외는

이들이 겪는 혼란을 잘 보여준다. 


생각보다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으니깐.


모난 돌이 정을 더 맞으니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 곧 사회화가 아니겠나.


패싱은 피부색으로 하는 인종차별의 허황됨과

그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 겪던 

고통을 보여준다. 


아이린도 원하면 '가볍게' 패싱이 가능했으니깐.

클레어처럼 완전하지는 않아도.


인종이 가장 두드러지지만,

패싱은 인종 간만 가능한 게 아니다.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을 숨김으로써

우리는 얼마나 많은 차별들을 피해 가는 가.

 

경계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지키거나, 잊거나, 벗어나기 위해 어떤 것을 희생하는지.

알면서 묵인하는 것들은 얼마나 많을지.


인종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이야기다.




p.14

언제나 위험의 모서리에 올라서 있는 것. 언제나 위험을 알고 있으면서도 뒤로 물러서거나 피하지 않는 것. 주변 사람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아무리 주의를 준들 꿈쩍도 않는 것. 


p.17

그 애에게는 놀랍도록 차분한 적개심이 있었는데, 그것은 도발되기 전에는 잘 감추어져 있었다.


p.63

그녀는 또 같은 짓을 했다. 클레어 켄드리의 설득에 넘어가, 시간도 아깝고 딱히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클레의 목소리에 담긴, 그토록 호소력 있고 그토록 유혹적인 그것은 무엇일까.


p.77-78

아이린은 "그거 멋지군요!"라고 소리치고는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웃고 또 웃었다. 눈물이 그녀의 뺨으로 흘러내렸다. 허리가 쑤셨다. 목이 아팠다. 그녀는 웃고 또 웃고 다른 이들이 웃음을 멈춘 뒤에도 한참 동안 계속 웃어 댔다. 

...

자신감에 찬 어조로 재밌어하며 말했다. "세상에 잭!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설령 내게 흑인 피가 한두 방울 섞인 것을 당신이 알아낸들 말이에요."


p.80

그녀는 옆에 있는 남자를 향해 외치고 싶은 거센 충동을 느꼈다. '그런데 당신은 여기 세 명의 검둥이 악마들에 둘러싸여 차를 마시고 있어.'


p.84-85

적어도 그녀는 클레어 켄드리가 틀림없이 느끼고 있을 굴욕감과 수치심을, 또 아이린이 억누르고 있는 분노나 반발심을 그녀들만큼 강하게 느끼고 있지 않았다. 

...

그녀는 클레어가 쉽게 이해되는 것만큼 그녀를 향한 연민과 경멸도 강하게 느꼈다. 클레어는 그렇게 대담하고 그렇게 사랑스럽고 그렇게 '자기 방식대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p. 88

클레어 켄드리는 무슨 권리로 그녀로 하여금, 심지어 거트루드까지 그런 굴욕을, 그런 노골적인 모욕을 당하도록 했단 말인가. 


p. 93

그녀가 듣기 좋은 소리를 좀 했다고 해서 불쾌한 기분이 누그러들지는 않았다. 그녀가 클레어 켄드리를 위해 어제 오후 견뎌야 했던 그 모욕감을, 혹은 그 일부라도 없앨 수 있다는 식이군, 하고 아이린은 격분한 채 생각했다. 


p.100-103

확신하건대 그것은 상황에 걸맞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

그렇게 시간이 지났음에도 지금 여전히 그 남자가 했던 말과 그 태도를 떠올리면 손이 떨리고 관자놀이에 피가 솟구치는 것이 당연했다.

...

클레어가 선택의 순간에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마땅히 그녀를 도울 거라고 기대할 권리 따위 그녀에게 없지 않은가. 클레어의 문제는 자기 케이크만 차지하고 먹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케이크마저 넘본다는 것이었다.

...

왜 그녀 자신은 그날 말하지 않았을까? 어째서 벨루의 무식한 증오와 혐오 앞에서 자기 인종을 숨겼을까? 왜 벨루에게 반박하지 않은 채 그가 자기주장을 하고 잘못된 생각을 입 밖에 내도록 놔뒀을까? 어째서 클러에 켄드리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겪게 만든 그녀 때문에 아이린은 자기 인종을 변호하려 나서지 못했을까?

...

그녀는 클레어 켄드리에게 지켜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다. 아이린은 그녀에게 인종이라는 끈으로 묶여 있었고 클레어는 힘껏 거부하면서도 그 끈을 완전히 잘라 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

클레어에게 아이린 자신은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

클레어 켄드리는 자기 인종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거기 속할 뿐이었다. 


p.107

글쎄, 언제나 그렇잖소. 우리는 늘 알지만, 상대는 그렇지 않아요. 전혀 모르죠. 언젠가 당신도 인정하게 될 거요. 그래서 재미있는 면도 있고, 때로는 우리 쪽에 편리한 면도 있거든.


p.110

"'패싱'은 정말 알 수 없다니까. 우리는 패싱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용서하잖아요.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감탄하고요. 묘한 혐오감을 느끼면서 패싱을 피하지만 그걸 보호하기도 하죠."

"살아남아서 번성하고자 하는 종족 본능이지."


p.121

그녀는 남편이 행복해지기를 원했지만,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그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이 유감스러웠고, 그가 행복해지기를 원하기는 해도, 오로지 그녀의 방식대로만, 그녀가 세워 놓은 계획대로만 행복해지기를 바라다는 사실을 그녀 자신은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p.134

"엄마가 되는 건 세상에서 제일 잔인한 일 같아."


p.161-162

"아이가 전부는 아니야." 클레어가 대답했다. "세상에는 다른 것도 있어.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서 그녀가 웃었다. 자기 말에 웃는 다기보다 그 여자만의 어떤 비밀스러운 농담에 웃는 것 같았다.


p.163

"내가 너랑 완전히 다르다는 거 모르겠어? 그래, 정말로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서라면 난 무슨 일이든 하고 누구든지 상처 입히고 어떤 것도 던져 버릴 수 있어. 정말이야, 르네, 난 위험해." 그 여자의 표정은 물론이고 목소리마저 간절하고 진지했으므로 아이린은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p.181

그녀가 지금껏 열었던 수많은 티 파티와 똑같이 흘러갔다. 동시에 그 전과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아직 속단해서는 안 된다. 충분히 시간이 있으니까. 가진 것이 시간뿐이니까.

...

브라이언과 함께하는 시간. 브라이언이 없는 시간.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웃고 싶고 비명을 지르고 싶고 물건들을 집어던지고 싶은 거의 주체할 수 없는 충동이 들어섰다.


p.184

클레어의 상아색 얼굴은 평소처럼 아름다웠고 다정했다. 어쩌면 오늘은 약간 가면을 쓴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자기 때문이든 혹은 누군가의 감정 때문이든 그녀의 모습은 변하지도 동요하지도 않는다. 그에 반해 브라이언은 측은할 만큼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이가 원래 저랬나? 자신을 절반쯤 감춘 채 탐색하는 표정, 저이 얼굴이 늘 저랬나?


p.187

하지만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을 그가 모르게 할 수는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할 것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있고 견딜 것이다. 그래야만 하니까. 아이들이 있으니까. 그녀의 온몸이 바짝 긴장되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어떤 것도 견뎌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로지 그녀가 무엇인가를 견뎌야만 한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기만 한다면. 고통스럽고 두렵지만 참을 수 있었다. 


p.190

그러나 상관있었다. 이전의 어떤 것보다 더 상관있었다.  


p.195

그녀는 다르지만 똑같은, 두 종류의 충성심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 했다. 그녀 자신에 대한 것. 그리고 그녀가 속한 인종에 대한 것. 아, 인종이라니! 그것 때문에 아이린은 결박당한 채 질식하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행동을 취하건, 또는 전혀 취하지 않는다 해도, 어차피 무엇 하나는 무너져 내릴 것이다. 


p.200

인종에 대한 본능적인 충성심, 어째서 그녀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까? 왜 거기에 클레어가 포함되어야 하는 가? 클레어는 그녀나 그녀가 속한 인종을 배려하지 않는데 말이다. 

...

그녀는 사람들을 인종으로부터 분리해 생각할 수 없었고, 그녀 자신을 클레어 켄드리에서 떼어낼 수 없었다. 


p.225

그녀는 어떤 위험도 감지하지 못했거나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녀의 도톰한 붉은 입술과 빛나는 눈에는 희미한 미소마저 어려 있었다. 

아이린을 분노하게 만든 것은 그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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