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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샤 Jul 20. 2022

그녀 손안의 죽음

오랜 시간의 가스 라이팅에서 벗어난 늙은 여인의 회한

#그녀 손안의 죽음 #오테사 모시페그




읽기가 굉장히 어려운 책이었다.

중간에 몇 번을 포기하고 싶었던지.

반절을 넘어갈 때까지도 집중을 못했고, 몇 번을 끊어서 읽었다. 

심지어 중간에 리뷰를 찾아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읽으면서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과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떠올랐다. 

그 둘의 중간 어디쯤에서.. 습작인가?

이렇게 두서없이 1인칭 생각의 나열이라니,

심지어 <자기만의 방>을 재밌게 읽었던 나였는데도 버거웠다. 


끊임없이 치매인가? 망상인 건가?

어디서부터 진짜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중반 이후부터는 현실이 상상과 맞닿는 것을 보고,

그 모든 게 베스타의 상상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고.

마그다가 그녀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점점 솔직해지는 그녀는

마그다를 상상해내며, 자신을 겹쳐본다.

죽은 남편인 월터를 만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고 울부짖는다.


오랜 시간 가스 라이팅에서 벗어나

목줄이 사라진 지금도 여전히 매인 것과 같이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회한.


외도를 하던 남편을 "용서"하고, 자신을 깔보고 무시하는 것을 넘기고.

그녀의 모든 기억이 마치 섞인 것처럼 서술된 이 글에서는

늙은 여성의 두서없는 상상이자 미친 소리처럼 들리는 소리 속에서

목소리를 높여, 

그녀의 지난 삶을, 남편에게 메여 살았던 그 삶을 고발하는 그녀가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여 삶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되찾는 베스타가.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그녀의 시선에 놀라게 된다. 

이 책은 그녀의.. 뭐랄까.. 울부짖음이 아닐까?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를

이렇게도 쓸 수가 있구나.


베스타는 대체 얼마나 많았을까.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많을까. 


영화로 나오면 좋을 것 같다. 



p.19

  어린아이면서 보호자 같은 동반자, 많은 면에서 나보다 현명하면서도 나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충성스럽고 다정한 존재가 옆에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선물인가. 


 p.23

  그런 게 본능이지. 본능은 매번 합리적이지 않고 종종 우리를 위험한 길로 이끈다. 


p.97

  하지만 사람들은 항상 거짓말을 한다. 어떤 면에서 그건 우리가 개인으로서 완전성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약간의 거짓말은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다. 한 사람의 특성이 다른 사람의 특성과 이루는 경계를 지켜준다. 물론 어떤 관계는 다른 관계보다 더 큰 정직성을 요구한다. 예컨대 남편과 아내는 진실을 말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p.102

  "다 예측 가능한 얘기들이야. 모르겠어? 내가 해결할 수 있어. 킬러는 늘 중앙에서 서쪽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는 그런 식으로 얘기했고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았다. 킬러는 바로 눈앞은 아니라도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 물론 나 역시 언제나 월터만큼 분명히 해답을 볼 수 있었지만, 그는 자기가 옳다는 사실에서 큰 기쁨을 얻었다. 자신이 영특하다고 느끼는 걸 아주 좋아했다. 나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한발 물러나 그가 나를 능가하게 두었다. 그러면서도 나 역시 재기 있는 사람임을 알았다. 어느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어도 매우 유능한 사람임을. 


p.107

  오, 물론 나는 정당한 방법을 쓰겠지만 게임은 내 방식대로 할 테다. 내 변덕과 상상을 따를 것이다. 그게 내가 원하는 사람이었다. 자유로운, 기대에서 자유로운 삶. 그것이야말로 정당했다. 


p.145-6

  사라진 잠재력의 상징인 희생자에게 큰 애정을 느끼기는 쉽지, 나는 생각했다. 허비한 가능성, 놓쳐버린 기회보다 더 가슴 아픈 건 없어. 그런 것들에 대해 나는 잘 알았다. 나도 예전에는 젊었고, 많은 꿈이 내동댕이쳐졌다. 하지만 그걸 내동댕이친 건 바로 나였다. 나는 안전하기를, 완전하기를 바랐고 확실한 미래를 원했다. '미래가 있기는 할까'와 원하는 미래가 올까', 이 두 질문을 혼동할 때 사람은 실수를 저지른다. 


p.151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지만,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게 진정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여느 멀쩡한 젊은 여자라면 누릴 만한 것을 나도 누릴 자격이 있었다. 


p.176

  나는 그의 유골 단지를 없애는 행위에 폐왕의 상징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정신 공간을 차지하는 월터를 이제 더는 원하지 않았다. 뭐든 나 스스로 알고 싶었다. 그러면 기분이 더 나아지겠지. 나만의 리듬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겠지. 마침내 나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겠지. 


p.182

  거기선 피크닉도 할 수 없었다. 월터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인질범 같았다. 그 세월 내내 인질로 잡혀 있었어, 나는 생각했다. 이제 내 맘대로 할 거야. 나 자신을 풀어줄 거야.


p.194

  그렇지만 나는 더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어떻게든 살인에 개입된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떠올리기 싫은 생각이긴 하지만 여자들은 언제나 아이들을 죽여왔다. 여자들은 아이들과 가장 가까이 있고 육아의 고난도 가장 많이 겪는다. 


p.212-3

  짐승 같은 놈들, 그 경찰들, 나를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내가 과학자의 아내였다는 걸 모르나? 내가 아주 우아한 실크 혼방 원피스를 입고 대학에서 열리는 만찬에 가곤 했다는 걸 모르나? 주상원의원의 아내가 내 머리 모양을 칭찬하기도 했다. 

...

  월터가 뭐라고 말할지 상상할 수 있었다. 물속 안식처에 들어간 지금도 이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겠지. "여보, 베스타, 당신은 이 일을 감당할 만큼 강하지 않아. 신경이 너무 예민하잖아. 당신은 작은 새 같아. 참새 주제에 매가 되려 애쓰고 있다고. 당신에겐 그런 기백이 없어. 그냥 아이 같은 사람이야. 어서 본모습으로 돌아와 잔소리나 하고 다니셔. 춤도 좀 추고 바닥을 쓸어. 내 귀엽고 보송보송한 아가씨야, 죽음은 당신과 안 맞아." 내가 호수를 영원히 월터로 오염시키고 말았다. 


p.250

  나는 밤에 그 길을 다시 걸어가며 찰리도 끌고 갔다. 처벌의 의미였다, 정말로. 녀석이 겁먹었다는 걸 알았다. 밥도 주지 않고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게 내가 찰리를 벌주는 방법이었다, 말없이 냉랭해지는 것. 그게 얼마나 잔인한지 월터에게 배웠다. 


p.251

  때로 그가 밤에 집에 돌아올 때, 저녁식사를 오븐에 데워두고 서재의 조명도 아늑하고 편안하게 켜 둔 채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그는 옆으로 휙 지나가며 내 머리를 후려치기라도 할 듯이 소파 등받이에 외투를 내던졌다. "안녕, 베스타"나 "잘 지냈어?"라는 말도 없이. 아무 말도 없이. 나중에 침대에 누워서 탄식하며 학생이나 동료나 마감이 임박한 논문 따위에 대해 불평했다. 마치 자기 일이 너무나 중요한데 삶의 사소한 문제들에 치이고 있다는 양. 그는 삶의 사소한 문제들이 뭔지도 몰랐다. 이미 결혼생활 초기에 그런 문제는 전부 내게 떠넘겼다. 죽을 때까지 삼십 년 동안 그는 한 번도 식료품점에 가본 적이 없을 것이다. 


p.255

  내 외로움과 다가오는 죽음을, 아무도 날 모른다는 사실을,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이제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인 부모와 그들이 내게 준 사랑이 얼마나 빈약했는지를 생각했다. 월터를, 매스꺼울 정도로 부드러운 그의 손길을 생각했다. 그는 나를 다정하게 대하려 할 때조차 업신여기고 통제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나는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무도 내게 이렇게 말해준 적이 없었다. "당신은 굉장해. 당신의 신랄함과 신경증적 기운마저도. 그 의심 많고 경직된 성격과 숱이 줄어드는 흰머리와 주름진 허벅지까지도."


p.256

  항상 무언가를, 뽐내도 좋다는 허락을, 힘을 휘둘러도 좋다는 허락을 원했던 월터. 나는 그 끔찍하고 해롭고 거만한 남자를 만나지만 않았다면 누릴 수도 있었을 사랑을 생각하며 울고 또 울었다. 자갈길을 향해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줄줄 흘렸고, 그 눈물은 박닥에 떨어져 내 뒤로 작은 자취를 남겼다. 


p.268

  오, 나는 남편과 사랑에 빠지면서 너무 많은 것을 박탈당했다. 예전에 나는 정말로 예뻤는데 지금은 형편없이 망가져버렸다. 입에 흙이 가득 든 늙은 여자일 뿐. 나는 분노에 휩싸여 몸을 뒤집고 하늘을 보며 숨을 돌리다가, 저 위에서 수치심도 없이 반짝이고 깜빡이고 일렁거리는 수많은 별들의 그 뻔뻔함에 다시 숨이 턱 막혔다. 많은 이들이 나처럼 다 타고 꺼져버렸는데도 별들은 여전히 깜빡깜빡 빛났다.

...

  지난 시간을 그렇게 살아온 나는 겁쟁이였다. 하지만 더는 안 돼, 나는 결심했다. 비록 두렵고, 어리숙하고, 정서적으로 타락했고, 나를 고통스럽게 한 모든 것을 교묘하게 부정해왔지만 그래도 버틸 거야. 다시는 안 돼. 


p.281

  월터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그의 배신에 대해 내가 사죄를 구하지는 않겠다. 누구든 나를 괴롭히면 칼날을 들이대겠다. 나를 기분 나쁜 눈길로 쳐다보기만 해도 썰어버리겠다. 


p.289

  그녀의 이름은 베스타였다. 그것이 내내 내가 쓰려던 말이었다. 내 이야기, 내 마지막 대사. 내 이름은 베스타였다. 나는 살았고, 또 죽었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할 것이다, 누가 나를 알기를 바랐던 적도 없지만. 


p.290

  그래, 그래, 난 여기서 죽을 거야. 내 방식대로 할 거야. 흙으로 돌아가는 방식은 내가 결정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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