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의 책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샤 Oct 11. 2022

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작가의 따듯한 상상

#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작가님의 신작이 나왔길래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었다.

 

다른 세상이지만 비슷한 구성의 이야기들.


우주 속의 한 존재가 되어 주변 환경만이 달라진 존재들의 변주 같았다. 

이전 작품들도 그렇고 

잔잔하게

아직 사람은, 사랑은, 세상은 믿을만하다는 것과

긴 시간의 호흡 속에서 살아가기에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라는 가정만으로도

평소에 수용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가벼워진다. 


개인적으로는 '마리의 춤'이 가장 좋았다.

소수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당당하다는 것에

왜 다수는 불편감을 느낄까. 

그리고 소수자들은 왜 이를 공유하고자 할까에 대한 글이었다. 

이야기에선 감각을 받아들임에 차이가 있던 모그였으나,

'모그'는 그 누구도 될 수 있다.


굳이, 모두의 앞에서 자신은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적인 춤을 춘 마리,

그렇게 시선을 끌고, 인위적으로 관객들을 순간적으로 모그가 되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한 것에 대한 논란,

특히 모그 내에서의 찬반의 목소리,

그리고 모그가 되기를 선택하거나 더 혐오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이는 현재까지의 수많은 목소리들과 같다. 

소수자로 표현되지만 사실은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 말이다.

성별, 장애, 인종, 정체성, 계급 무수히 많은 다양성들. 



오래된 협약도, 로라도, 숨그림자도 사실 전부 다 좋았다. 





최후의 라이오니


p.24-25

  그것은 내게 주어진 첫 단독 의뢰였다. 타인의 기준으로는 그저 쓸모없는 요청, 무시해버려도 아무 상관없는 한 줄의 의뢰였지만, 나는 그것이 내 가치를 비로소 증명할 때가 되었다는 시스템의 시험이라고 생각했다. 

...

  나는 평생 내가 가진 결함의 근원을 찾아 헤맸다. 나는 처음으로 평온함을 느낀 장소, 3420ED에 오면 나의 결함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p.43

  라이오니는 우리의 두려움에 공감하는 유일한 복제였죠. 기계들에게도 소멸의 공포가 있다는 것을, 다른 복제들은 이해하지 못했지요. 라이오니는 남아서 기계들을 터널 밖으로 안전하게 데려갈 방법을 찾으려고 했어요. 


p.51

  나는 셀이 나를 라이오니라고 믿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믿지 않기를 바랐다. 


p.53

  돌아오는 길에는 태어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나에게 주어진 이 태생적 결함이, 사실은 결함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마리의 춤


p.70

  마리가 모그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내비치는 자긍심은 무엇일까. 마리는 이 수업에서 무엇을 배우고 싶은 걸까. 마리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일까. 

...

  마리는 낯선 존재였고,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마리는 내가 한 번도 만나 적 없는 학생이었고 앞으로도 만날 일 없는 학생이었다. 나는 마리가 궁금했고, 그 애를 더 알고 싶었다. 그것이 누군가를 가르치기로 결정하기에는 부적절한 이유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p.77

  마리는 보여지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처음에 마리는 그 아름다움을 모른다고 말했으나 무지보다는 무관심이 더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마리가 하는 일은 춤이라기보다 목각인형의 기능적인 움직임처럼 보였다. 

...

  애초에 모그들은 구체적인 형상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으며, 플루이드가 전해주는 공간 묘사가 아니라면 모든 춤 동작은 단지 허공을 가로질러가는 형체의 이동으로만 보인다고 했다. 


p.79

  "그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요? 정말 누가 들어도 엉망진창인 공연을 했는데. 우리는 열다섯 살이었고, 열다섯 살은 어린 나이지만 때에 따라 탁월함을 기대받기도 하는 나이잖아요. 그날 저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

  "저는 선생님과 제가 하고 있는 것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이건 같은 춤이 아니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하든 무시할 수 있어요. 어차피 그들은 제가 뭘 하는지 모르니까요." 


p.85-86

  마리와 함께 있으면 가끔 나는 눈을 가리고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럴 때 움직임은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내재된 것이었다. 근육 속에, 피부의 표면 아래, 혈관 속에. 마리와 춤을 출 때 나는 구체성의 세계로부터 자유로웠다. 


p.90-91

 나는 배신당한 어린아이처럼 행동했다. 어른답게 구는 대신 내가 느끼는 분노를 마리에게 쏟아냈다. 마리와 내가 공유했던 모든 것이 거짓에 불과하다고 느꼈다. 

"선생님. 저를 만나기 전에 다른 모그를 본 적 있어요?"

"아니."

"왜 못 봤다고 생각해요?"

...

  나는 연습실을 나오면서 테두리 밖으로 약간 밀려난 기분을 느꼈다. 내가 단 한 번도 속한 적 없는 그 세계에서. 그것은 아주 이상한 느낌이었다. 


p.94-95

  논쟁적인 선택은 모그에 관한 다른 논쟁들을 이끌어냈다. 사람들은 모그들의 존재를 갑작스레 알아차렸고, 그 사실에 놀랐다. 어느 쪽이든, 사람들은 그 사건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

  나는 플루이드가 완벽한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취할 수도 있었던 어떤 소통의 형태였다고 생각한다. 


p.96-97

  그는 마리의 행동이 부적절했다고, 지금도 결코 마리의 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대에서 보았던 것이 단지 사건의 전초 단계만은 아니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

  그게 마리의 변덕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아 자리를 떠나지 않게 하려는 목적이었는지, 그것도 아닌 다른 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춤의 어떤 부분들은 플루이드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어떤 순간에 마리는 진심으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고 그는 말했다. 

.. 

  빛은 얼마나 상대적인 것일까?

  문득 나는, 어딘가에서 춤을 추고 있을 마리를 생각했다. 



로라


p.111

  트랜스 휴먼들은 신체를 변형하고 개조하는 것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목숨이 위험해지지 않는 선에서, 혹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해가며 그들은 최대한의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확고했다. 더 나은 기능을 추구하며, 기존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 


p.118

 "네가 떠나면 난 아주 슬플 거야. 너를 사랑하는 일은 나를 기쁘게 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되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어. 나 자신이 되는 일은 인생 전체를 건 모험이야. 네가 날 지지해주면 좋겠어. 그럴 수 없다면..."

  로라는 말을 멈췄다가, 진을 한참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래도 상관없어. 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으니까."


p.119

  진이 가장 괴로웠던 것은 로라가 애초부터 이해받을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로라는 과잉 사지를 오로지 자신의 문제로만 남겨두었고, 오랜 시간 진에게 세 번째 팔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며, 기계 팔을 달기 직전에야 모든 것을 통보했다. 진은 로라의 그런 태도를 보며, 로라가 처음부터 어떤 이해도 기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괴로움이 <잘못된 지도>를 쓰도록 진을 이끌었을 것이다. 글은 진이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이었고, 진은 로라의 내면을 알고 싶었다. 


p.126-7

  눈이 마주쳤을 때, 로라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씩 웃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여전히 로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동시에 제가 앞으로도, 어쩌면 영원히 로라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요.  

  하지만 그걸 깨닫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신에게도 있지 않나요.

...

  진이 끝내 이해할 수 없을 로라가, 그곳에 있었다. 



숨 그림자


p.151

  조안을 살린 것이 조안을 위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연구원들은 숨그림자 사람들이 조안을 죽음에서 구해준 것처럼 말했지만, 조안의 시간은 이미 수백 년 전에 끝나버렸는지도 모른다. 조안에게는 이 모든 것이 불필요한 사후 세계처럼 달갑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p.174

  "사람들이 나를 위해 대화를 멈춘 적 있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들을 서로 주고받는 걸 중단한 적이 있어? 공기가 침묵으로 가득 찬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 그런 적이 없다면, 나는 여기 속한 적이 없는 거야."


p.182-3

  "이곳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들이 이곳을 덜 미워하게 하지는 않아. 그건 그냥 동시에 존재하는 거야. 다른 모든 것처럼."

  단희는 조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단희도 숨그림자를 사랑하면서 미워했다. 숨그림자를 사랑할 이유들보다 더 많이, 이곳을 미워할 이유들이 있었다. 

  그러나 단희에게는 입자가 있고 조안에게는 없기 때문에, 단희는 남고 조안은 떠날 것이다. 무엇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오래된 협약


p.202

  아득한 시간을 순간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우주 여행자들의 습관이라던가요. 제가 그 질문에 무어라고 대답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날 밤을 새워 우리의 대화를 생각했던 것만은 기억합니다. 마음의 일부가 이정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것 같았어요. 


p.209

  우리는 신을 믿는 대신 신앙의 필요를 믿지요. 그리고 그 필요에 복무합니다. 


p.221-2

  우리가 중추신경계를 가진 개체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 전체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

  그것은 우리의 오래된 협약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언뜻 죽은 고목처럼 보이는 오브들은 이 행성 전체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땅 위로는 몸의 일부를 드러낸 채, 행성 자체로 기능합니다. 그들은 개체인 동시에 집단이며, 개체로서의 지성과 집단으로서의 지성을 모두 지닙니다. 집단으로서의 오브는 사실상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가지요. 


p.223-5

  우리의 긴 삶에 비하면 너희의 삶은 아주 짧은 순간이지. 그러니까 우리가 행성의 시간을 나누어 줄게.

  그리고 그들은 오랜 잠에 빠져들었어요. 행성의 생태계가 멈추면서, 대기 중의 루티닐도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수준으로 줄어들었지요. 살아남은 우리는 결코 그들을 해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연약한 우리의 몸은 잔존하는 루티닐만으로도 쉽게 손상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이 행성의 시간을 잠시 빌려 온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지.

...

  제가 평생을 지나도 이해할 수 없을 어떤 결정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먼 우주에서 온 작은 존재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떼어 주기로 결정하는 마음이, 이 잠든 행성 펠라타 전체에 깃들어 있었어요. 저는 눈을 감고 그들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그 오래된 협약을, 수 백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지키고 있는 존재들을. 


p.225-6

  우리는 당장의 삶을 갈구하여 협약을 위협했던 사례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어요. 그렇기에 벨라타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앎이 아닌 무지이지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절제하게 만드는 것은 평생에 걸쳐 우리를 지배하는 규율이고 신앙이며, 금기에 대한 복종입니다. 

...

  계속해서 돌연변이들이 태어나고, 우리 역시 이 환경에 서서히 적응하며 벨라타 생태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

  그때 저는 아주 긴 잠을 자고 있겠죠. 저는  땅 위로 내딛는 당신의 발걸음을 느끼고, 꿈결 속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거예요.  오래전 이곳에 머물렀던 어떤 반짝이는 시간들을 생각하면서요. 

  아마도 그것만으로도 저는 괜찮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지 공간


p.235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계기였을 뿐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브가 진심으로 좋아졌다. 날세운 외견 뒤에 숨겨진 이브를 알아가는 일은 꽤 재미있었다. 이브는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고,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겁내 하면서도 사람을 무척 잘 파악했다. 


p.237

  공동 지식은 우리가 어린 시절 간직했던 차이를, 서로의 다른 기억을 잊게 만든다. 그 사실을 상기해주면 이브가 안심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브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이걸 모두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어. 내가 당했던 일들은 다 어디로 가는데? 그런 건 사라지지 않아."


p.254

  "제나, 난 너처럼 인지 공간을 돌아다닐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 아무런 지식도 소유하지 못했다고 해서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건 아니야."


p.256

  이브와 나 사이에는 진공과 같은 거리감이 생기고 있었다. 

...

  오랜 친구를 포기하는 일도 성장의 일부인지도 모른다고, 모든 관계는 변화할 수밖에 없다고.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이브가 진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제대로 듣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가끔은 내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브의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도 있었다. 그 애가 나와 함께하고 싶어 했던 일들을 함께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이브는 그렇게 빨리 나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케빈 방정식


p.321

  언니가 옳았다.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다. 세계는 거품 방정식의 해로 가득 차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언니는 아주 천천히, 영원에 가까운 속도로 입꼬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언니가 의기양양하게 소리를 내어 하하 웃는 것처럼 보였다. 

  거봐, 내 말이 맞았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2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