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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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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샤 Mar 14. 2024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함부로 판단하지 말 것.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문미순



시체를 은닉하고 유기한다는 것.

그것도 부모의 시체를 그렇게 한다는 것은 꽤나 반 인륜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 행위가 어쩔 수 없는 일이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득하며 정당화시킨다. 


겨울은 매우 혹독한 계절이다. 

특히 돈이 없는 이들에게는 혹독을 넘어서 가혹하지. 

간간히 뉴스에서 누군가 얼어 죽거나, 연금을 위해 부모의 시체를 은닉하거나, 생활고로 자살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안타깝고 슬프지만, 화면 너머의 이야기일 뿐이다. 

내가 아니란 것의 다행감을 느끼게 하며, 찰나의 슬픔과 분노를 공유하게 하는 이야기 말이다. 


소설은 그보다는 우리에게 가깝다. 

주인공의 관점에서 그 호흡으로 글을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나는 당사자가 되어 있다. 


고령화로 사망 시기가 늦춰지면서 지금은 어느 시대보다 치매를 자주 경험하는 시대가 되었다.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들과 돌봄 노동자들은 아주 먼 모르는 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이고,

우리도 곧 경험할지도 모른다. 


"아프면 돈이 든다" 이는 만고 불변의 법칙이랄까. 

아픈 사람이 집에 있으면 집안이 거덜난다.


이와 더불어 자신과 주변인이 누구인지를 서서히 잊어가는 신경인지장애는 마음의 고통도 함께 증가시킨다. 

"예전에는 이런 성격이 아니셨는데... 이렇게 폭력적이지 않으셨는데..."라는 

의문과 안타까움은 눈앞의 섬망으로 인한 난동으로 희미해지고, 

갈라지는 신경줄과 날카로워지는 예민함만 남기 마련이다. 


김영하 작가님의 <살인자의 기억법>이 치매 증상을 파악하기 좋은 것처럼

이 책은 간병하는 가족의 고통을 확인할 수 있게 도와준다. 


누구나 아플 수 있기에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모두 다르며,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다지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짧고 단순한 서술이기에

오히려 더 서늘하고, 답답함과 먹먹함이 잘 느껴진다. 

정유정 작가님의 추천사를 보고 읽기로 결정했는데 좋은 선택이었다. 


p.253 (추천의 말_정유정)

  작가가 혹독한 수련을 했겠구나, 싶었다. 한순간도,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랬다. 손에 쥔 정보를 어디서 풀어놓고, 어떻게 거둬야 하는지 잘 안다는 점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어둡고 중량감 있는 이야기를 장악하는 작가의 악력이었다. 



p.s 특히, 개인의 노력만이 결과를 만든다고 믿는 자들은

더더욱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소설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이야기니까. 





p.22

  햇빛은 그 자체로 좋았다. 준성은 햇빛 아래 있으면 빛의 알갱이들이 자신을 감싸고 자신을 이루는 알갱이들과 뒤섞여 그 또한 이 우주의 일원이라고 상기시켜 주는 듯했다. 그 역시 17번 유니폼을 입고 달리던 청년과 같이 빛나는 존재임을. 그래서 그가 처한 현실, 변변한 직업도 없이 병든 아버지를 돌봐야 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밤으로 대리운전을 뛰어야 하는 스물여섯 살의 청년이라는 사실로부터 잠시나마 그를 해방시켜 주었다.


p.85

 명주는 만 원이라도 싼 고시원을 찾아 방을 옮겨 다녔다. 기초수급자 신청을 해보려 했지만 원인불명의 통증으로는 의사로부터 '근로능력불가'라는 평가를 받기가 어려웠다. 가난을 증명하는 것도 어렵고 수치스러운데, 몸이 아프다는 걸 증명하는 건 더 복잡하고 굴욕적이었다. 고시원 방세가 밀리기 시작했고 급한 약값을 벌기 위해 생동성 알바 자리를 눈여겨보기도 했다. 


p.91

  조금 전까지 급식 조리원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그냥 보험사 콜센터 일을 계속하고 있었더라면, 백화점에 계속 다니고 있었더라면, 남편과 이혼하지 않고 참고 살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은진이 그런 아이가 되지도 않고, 자신이 발에 화상을 입지도, 발바닥 통증에 시달리지도, 엄마가 지금처럼 미라로 누워 있지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이혼 전의 시간으로 돌아가 살고 있을 생각을 하니 그건 더 끔찍했다. 시간은 앞으로만 가지 뒤로 가는 법은 없다. 인생에 만약이란 가정은 없듯이. 


p.108

 순진하게도 아버지가 술을 끊었다고 믿었다니. 준성의 두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아질 거라고, 언젠가는 좋아질 거라고 믿고 있었다니. 준성은 이제껏 굳게 믿고 있던 신념들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 다시 무얼 믿고 일어서야 할지, 일어설 방법이 있기나 한 건지 누구에게라도 묻고 싶었다. 하느님, 제 앞날에 과연 희망이 있기는 한 건가요? 준성은 분노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하늘에 대고 소리 없이 외쳤댔다.


p.123

 명주는 준성의 말을 들으면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차라리 고아가 되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간병은 그 끝이 너무나 허무하고 너의 젊음을 앗아갈 뿐 아니라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수도 있다고. 


p.127
  명주는 황망해하던 702호의 눈빛이 자꾸만 떠올랐다. 무언가 거침없는 물살이 그의 인생을 할퀴고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명주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이가 좀 많다고 해서, 인생을 좀 더 살았다고 해서 그 물살에 언제나 잘 대처하는 것은 아니었다. 

p.131
  불이나 아버지가 화상을 입었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위태롭긴 해도 이나마 잘 버티고 있다 생각했는데. 불길과 연기가 자욱한 집 안에서 아버지가 허우적대는 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하느님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었다.

p.136
  준성은 선뜻 계산이 서질 않았다. 대리운전을 하면서 300만 원이 넘는 간병비를 대는 건 무리였다. 하루 종일 쉬는 날 없이 대리운전을 뛴다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꾸로 준성이 오롯이 간호를 맡는다면 생활비와 병원비를 어찌해야 할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준성은 다시 중환자실 앞으로 걸어와 의자에 앉았다. 비상금으로 붓고 있던 적금을 헐어야 하나, 머리를 뒤로 젖히고 고민하는 중에 문자 알림이 떴다. 국시원에서 보내온 문자였다. 준성은 떨리는 마음으로 문자를 클릭했다. 

박준성(49023)님께서 응시하신 제48회 물리치료사 국가시험에 불합격하셨습니다. 

p.141-2
  명주는 엄마가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두 분은 분명 제주도에 가는 비행기에 올랐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치매가 급격히 진행되지 않았더라면 엄마는 할아버지와 비행기에 올라 놀라 하는 할아버지의 손을 단단히 잡아주었을 것이다. 제주도로 날아가 깨끗한 방을 잡아놓고 택시를 대절해 이곳저곳을 즐겁게 돌아다니셨으리라....
하지만 엄마가 돌아가시고 없는 지금, 이제와 그런 생각이 다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p.142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한 후 공기청정기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명주는 구석구석 꼼꼼히 소독약을 뿌리다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언제까지. 그리고 그런 의문은 이제 어떤 식으로든 엄마를 매장해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p.151
  담배를 피우며 분노를 삭이는 건 제 몸만 태울뿐이었다. 건물 옥상에 올라 떨어져 죽어도 회사는 눈도 깜박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소변보러 갈 시간조차 감시하며 하루 백 통의 콜을 소화하라 쪼아대는 이들이었으니. 회사가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명주는 이제야말로 진상들을 퇴치하는 확실한 매뉴얼을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p.156

  트럭 주인은 부끄러운 듯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 술 취한 자신을 여기까지 태워다 줘서 고맙다며 준성보다 더 깊이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대리 고수들 중 누군가 이런 말을 했었다. 겪어보니 인간들 중 8할은 보통 사람이고, 1할은 좋은 사람이라고. 준성은 방금 그 1할의 좋은 사람 한 명을 태우고 온 것 같았다. 


p.164

  귓속에서 삐 - 하며 이상한 마찰음이 울어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명주는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계속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댈 뿐이었다. 


p.170

  자린고비에 허구한 날 큰소리만 치고 가족들한테 해준 것도 없는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어. 눈물도 안 나고 슬프지도 않은데 안 됐단 생각이 들더라고. 고작 이렇게 살다 죽을걸 그렇게 애를 썼나 싶은 게. 


p.171

  아버지를 간호하다 고3 땐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어요. 지각을 밥 먹듯 했고 결석도 잦았어요. 친구는 사귈 수도 없었고요. 담임 선생님도 처음엔 아버지가 그렇다는 걸 알고 배려해 주다 결석이 잦으니까 이럴 바엔 차라리 자퇴를 하라는 거예요. 반 분위기 흐려진다면서요. 아버지한텐 내가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인데 학교에선 없어져야 할 존재였어요. 그런 게 너무 힘들었어요. 제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닌데. 결국 학교는 그만두고 나중에 검정고시를 봤어요.


p.173

  명주는 702호의 맨발을 보며 말했다. 702호가 힘없이 돌아섰다. 명주는 떨고 있는 그를 집으로 들여보내고 방으로 돌아왔다. 702호의 야윈 얼굴과 흐느끼며 떨던 목소리, 추위에 얼어 있던 슬리퍼 속 맨발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명주는 그날 밤 여러 궁리로 몸을 뒤척이다 엄마의 연금 통장을 그에게 건네주고 죽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p.189

  아버지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준성은 바닥에 널브러진 아버지를 흔들며 소리쳐 불렀다. 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 대답이 없었다. 준성은 무얼 어찌해야 할지 도무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검은 장막 같은 두려움이 온몸을 덮쳐왔다. 준성은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벌벌 떨었다. 누군가 목을 조르기라도 한 듯 숨통이 조여들었다. 


p.220

  준성은 말없이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혼자서 비밀을 떠안고 남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각자 견뎌야 할 몫은 있는 법이었다.


p.224

  가난도 싫고 이 집만 아니면 좋을 거 같아서 결혼해 나갔는데, 돌고 돌고 돌아서 온 게 결국 집이었네....

- 왜 말해주지 않았어? 사는 게 원래 이렇게 지긋지긋하고 지옥 같다는 거. 엄만 알았어? 엄마는 알았냐고. 응?...

- 몰랐겠지. 몰랐으니까 버티고 버티다 이렇게 정신 줄을 놓아 버렸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돼버렸겠지. 


p.233

  아버지가 술에 취하면 늘 하는 말이 있었다. 이것도 한 인생인 거야. 그 말을 들을 때면 준성은 아버지가 세상에 태어나 눈에 띄게 이룬 것도 없고, 자랑할 만한 것도 없어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 보잘것없는 인생에 대한 변명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에게도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훈계를 하거나 강요한 적이 없다고 여겼다. 아버지는 그렇게 보잘것없어 보이는 당신의 삶을 조용히 홀로 삭이다 부지불식간에 가셨다. 이제 준성은 아버지의 말이 다르게 다가왔다. 아버지가 살아낸 인생은 그것대로 하나의 인생이니, 너도 네 삶을 네 스스로 짊어지고 살아가라는 의미로. 화려하지 않아도, 드러낼 만한 인생이 아니어도 모든 삶은 그대로 하나의 인생이니까.


p.235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협상해 나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준성은 막다른 길에서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p.253 (추천의 말_정유정)

  작가가 혹독한 수련을 했겠구나, 싶었다. 한순간도,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랬다. 손에 쥔 정보를 어디서 풀어놓고, 어떻게 거둬야 하는지 잘 안다는 점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어둡고 중량감 있는 이야기를 장악하는 작가의 악력이었다. 


p.255

  고 박상률 선생님이 어느 강연에서 젊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하셨다던 말씀도 그중 하나다. 


"너무 젊어서부터 소설에 모든 걸 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가 그 일에 전문가가 되고 그것에 관해 쓰면 그게 소설이 되는 거지, 소설이 뭐 별건가요?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어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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