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책금지
아이가 좋아하는 방과후수업의 공개수업이 있는 날.
1학기 공개수업 때 못갔더니, 이번에는 꼭 와야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기도 했고, 아이의 월요병을 완화시켜주는 고마운 방과후수업이었기에 얼마나 아이가 재밌게 활동하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주저없이 그러마 했었다.
2학기초 상담 때, 담임선생님은 아이가 1학년 입학초기처럼 여전히 긴장하고 지내며 불안이 있어 보인다고, 트라우마가 될만한 사건이 있었는지 물어보시며 심리검사를 권유하셨다. 동네 놀이터에서 잠깐씩 지켜봐도 다른 친구들과 원활히 어울려 노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어느정도는 예상했으나, 아이가 학교생활을 자세히 얘기해주지도 않았고 집에서는 그래도 아이가 전보다는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인지, 걱정스런 표정의 담임선생님을 마주하고 나오는 길 발걸음은 무겁고 눈물샘도 주책맞게 터져버렸었다.
그래도 방과후수업에서는, 아이가 좋아하는 수업이니, 좀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했었나 보다.
나의 아이는 말하는 일이 드물었고, 모둠의 친구들이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놀이하는 모습인 데 비하면, 뭔가 한박자 늦게 이해하고, 행동도 느린 편이라 같이 놀이하는 친구들이 은근히 눈치를 주고 구박하는 것 같은 장면이 보이기도 했다. 그 수업에 있는 20명 가까운 다른 또래 친구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대부분 자기주장 하는 것이나 또래와의 소통에 어려움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고싶은 보드게임이 있는 모둠을 선택하라는 선생님 말씀에 아이들은 너도나도 자리를 찾아 갔지만, 나의 아이는 마지막까지 서서 갈팡질팡 하는 바람에 게임시작 시간을 지연시키기도 했다.
이런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내 의식 속에 자리하였다.
1. 또래 아이들에 비해 확연히 나의 아이가 ‘부족해 보인다.‘
2. 내가 좀더 나서서,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놀게 하고 편안하게 관계맺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줬어야 했는데, 내가 바쁘고 힘들고 내 코가 석자라는 이유로 그러지 못해주어서 이렇게 사회성 발달이 늦은 것일까.
3. 아이가 좀 늦될 지언정 다른 아이를 놀리거나 괴롭히는 모습은 없었다. 사실 이걸로도 충분하지는 않은가? 아이가 ‘부족하다’는 나의 생각은 은연중에 생긴 ‘사회적 기준’, 나의 완벽주의 성향의 발로인 그 허상에 근거하는 것은 아닌가?
3번의 생각이 내 의식 속에 나타나기 시작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종전의 나는 늘 주로 2번의 생각을 붙잡고는 자책의 터널 속으로 깊이 깊이 더 들어가곤 했었다. 이제는, 무엇보다 나의 건강과 행복이 중요하며 그것에 기여하는 생각과 행동을 선택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자책의 터널 입구에서, 다른 건강한 길을 찾아 생각의 걸음을 옮기는 것!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내가 앞으로 남은 평생 갖고 싶은 생각의 습관이다.
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눈이 어디에 머무는지 돌아볼 일이다. ‘사회적으로 무난한’ 아이가 되는 것이 진정 바라는 일인가, 아니면 ‘깊은 행복을 느끼며 사는’ 아이가 되기를 바라는가. 이렇게 질문한다면, 당연히, 언제나, 후자이다.
방과후수업을 마치고 손잡고 돌아오는 길, 아이는 오늘도 재미있었다고 한다. 그래, 그러면 되었다.
나의 행복, 그리고 아이의 행복, 우리 가족의 행복이 언제나 내 의사결정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