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자도 힘들어요

흔해 빠진 퇴사의 기록

by 노니

내 생애 가장 긴 여름이었다. 가까스로 빠져나온 여름의 끝에서 여름 나라로 여행을 떠났으니, 내내 여름이 이어진 기분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또 금새 열 닷새가 지났다. 시간은 참 성실히도 흐르고 있고 나도 그 시간들을 고스란히 온 몸으로 지나고 있다.


처음에는 덜컥 성급한 후회가 시작되었다. 그냥 언제나처럼 조금 더 버텨볼 걸. 뭐 대단한 걸 하겠다고 나온거야,로 시작된 후회는 곧 자책으로 이어졌다. 이 정도도 안힘든 사람도 있나, 나만 왜 유난을 떨었지. 왜 이렇게 대책없이 사나. 그리고 애꿎은 나이 탓. 서른 다섯살은 그저 서른 네살과 서른 여섯살 사이의 나이일 뿐이라고. 생각해보려고 애썼지만 세상 어디에도 서른 다섯살의 백수가 일할 곳은 없을 것 같았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아침이면 이 생각은 더욱 절정으로 치달았다. 한심해 한심해.

누군가에게 이 걱정을 털어놓을라치면, 더 쉬어도 된다고 벌써 왜 걱정이냐고 했다. 내가 조급한건지, 그들이 알아주지 않는건지 알 수 없었지만 내 생각과 다른 그들의 이야기는 듣기 싫었다. 나는 얼른 일을 구해야 하고, 글은 일을 하며 중간 중간 취미 삼아 쓰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라고, 사실 나는 원래 그것을 더 바랬다고 자신을 기만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끝도 없는 우울이었다. 아무 곳에서도 쓸모 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성실하지도 못했고, 능력도 없는데다가, 내세울 경력도 없고 심지어 외모도 후지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런 내가 나이까지 먹었으니 내 삶은 앞으로 지금 보다 더 좋아질 일은 없겠다는 생각까지 해봤다. 처음이었다. 비관적인 생각은 되도록 깊이 하지 않는 내가 해본, 최고의 비관적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언제나 그랬듯 회복은 단순하다. 외부의 자극에 마음과 몸을 활짝 열어 재끼면 서서히 시작되었다.


퇴직연금과 관련한 은행 업무를 봤다. 부지런해졌다기 보다는 통장 잔고가 '0'원이 되는 바람에 바로 신청했다. 퇴직금은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내가 일한 기간에 비례해 정해진 대로 산출되었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돈이 내 통장에 들어오자 마음이 조금 녹았다. 하. 십일조를 떼고 필요한 돈을 떼놓고, 퇴직금을 받았을 때 뭔가 대접하고 싶었던 친구에서 밥을 샀다. 나머지는 다시 저금을 했다.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 입으로 회복을 고백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때마침 말씀 공부 모임이 시작되어 마음을 나눌 사람들이 모였다. 말씀을 읽는 과제가 생겼다. 언젠가부터 진절머리가 나던 그 '책임감'이라는 단어가 한번씩 마음에 떠올랐다. 때로는 어떤 책임을 맡는 것이 몸을 움직이고 생각을 움직이는 시작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듣기도 싫던 말을 내 스스로가 되새기고 있었다.

다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내내 아무의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잔소리가 아닌 위로에도 괜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더니만 이제야 좀 차분해졌다.


그러니 다시 뭔가를 쓰고 싶어졌다.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회사를 그만뒀는데, 이 일을 하면서 너무 스트레스 받아요.

제가 괜히 그만둔걸까요. 이 일이 저에게 맞는 일이 맞을까요?

윤대현 선생님이 대답하셨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힘들지 않을거라는 생각부터 바꿔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해도 힘들다. 삶은 원래 苦海라고. 이것부터 인정하고 가자, 그만 두고 싶어서 그만뒀지만 그만둬도 힘들거라는거.




목표는 글을 쓰는 것에서 읽어주는 글을 쓰는 것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좀 더 잘 쓰는 것으로.

강연을 듣다가 순간 멍해졌다. 언제까지 강연이나 수업만 들으면서 학생 처럼 배우기만 한다는거지. 그런 교만한 생각이 들어오니 한 2-3분쯤 앞에서 말씀해주시는 작가님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순간, 아주 사소한 목표도 세우지 않고 수다 떨듯 글을 적고 있는 내가 떠올라 다시 연필을 잡고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배운건 해보는거다. 그게 학생이지. 늘 그리도 바라던 시간이다. 넘치도록 넉넉한 시간이다. 돈을 벌지 못하는 시간이지만, 그래서 진짜 내 멋대로의 시간이다. 걱정하지 말자. 언제나처럼 나는, 잘 지낼 것이다.








한 달을 영화 필름이라고 생각하면, 초당 프레임이 많을수록 화면 속 주인공, 그러니까 내가 훨씬 생동감 넘치게 움직일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일상의 자잘한 디테일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월급명세서를 받지 않았어도 내가 한 달을 충실히 살았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길 바라면서.

<한달의 길이> 無日, 구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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