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왜인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하는 한 언제나 내 장래희망은 선생님이었다. 오래 고민하는 걸 싫어하니, 대강 정해놓은 진로에 대해 의심보다는 확신을 더해가며 살았을 거다. 마치 되어야만 했던 것처럼. 불행인지 다행인지 무난히 사범대에 진학했고, 선생님이 될 거라는 믿음에 믿음을 더했다. 임용 시험이 어렵다지만, 그래도 나는 되겠지. 안일하기 짝이 없게 생각했다. 이런 마음이니, 대학을 다니는 내내 진로 고민은 단 한순간도 한 적이 없었다. 남들 다 하는 영어 공부도, 교환 학생도, 유학도, 여행도, 심지어 아르바이트도, 어떠한 경험에도 관심이 없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얼른 시험 붙고 선생님 되어야지' 항상 이게 전부였다.
1학년 처음 들어갔을 때, 선배님들이 점수 잘 받는 교양 과목들을 추천해줬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전공이 한문이면서도 '교양 한문'을 수강했다. 선배들이 강력 추천해준 과목이었다. 이유는 딱 하나, 점수받기 쉬우니까. 한 명의 자퇴생을 제외하고 우리 학번 전원은 휴학 한 사람도 없이 모두 함께 졸업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놀라운 이야기지만, 우리에게는 무척 당연했다. 굳이 휴학을 왜? 어차피 볼 거, 얼른 임용 봐야지. 아직도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 3학년 여름 방학, 한 학년 위 4학년 언니 두 명이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얘기를 듣고 친구들끼리 소위 언니들을 씹었다. 정신이 있는 거냐, 4학년 여름 방학부터는 진짜 임용 공부 제대로 시작해야 하는데라는 이유였다. 좀 심하게 시야가 좁았다. 고민이라는 걸, 했기야 했겠지만 제대로 해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별 대책도 없이 무턱대고 매달렸던 '임용 공부 4년, 시간 강사 4년 6개월'을 채우고 선생의 시대는 끝이 났다.
학교를 그만두고, 3개월쯤 잘 쉬고 나니 다시 고민이 시작됐다.
이제 나는 뭘 해야 할까? 마치 처음 해 본 질문처럼 낯설고 어색했다.
딱히 생각나는 건 없고, 시간은 가고. 집에서 조금씩 압박이 시작되면서 은밀하게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카페 아르바이트, 언젠가 꼭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알바의 로망. 제대로 된 진로를 정해야 한다고도 생각했지만, '한 번 해보고 싶다'의 마음이 더 컸다. 아, 이 얼마나 단순한 사람이냐는 말이다. 그저 재밌어 보였다. 그즈음 언니와 형부에게 "사람이 재미만 가지고 살 수는 없다"라는 말을 들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닌데' 앞뒤 안 가리고 재밌어 보이는 일에 몸을 맡길 수 있는 건, 나에겐 되레 대단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카페에 이력서를 몇 개 넣었지만 어디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이 때문인가' 한탄이 시작될 즈음,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을 보러 오라고. 대학교 안에 있는 카페였다. 도착해보니 점장님은 흰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에 갈색 앞치마와 갈색 헌팅캡을 쓰고 있었다. 어머나, 안 예뻐라. 저런 걸 머리에 쓰게 되는 건 내 예상에 없었지만 일단 꼭 해보고 하고 싶다고 내 마음을 피력했다. "저도 커피 늦게 시작해서, 남 일 같지 않아서요. 같이 일해봐요." 이럴 수가, 나이가 많았던 게 주효했다니.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점장님은 나보다 네 살이 더 어렸다. 커피 늦게 시작했다더니. 참나.) 점장님은 뒤늦게 자기의 꿈을 찾은 것으로 보이는, 나이 든 알바생에게 홀딱 감정을 이입해버렸다. 일하는 동안 내가 열심히 한 것도 있겠지만, 나를 정말 예뻐해 주셨다. 오픈 조로 5시간 근무를 마치고 나면 그 뒤는 자유 시간이었다. 유니폼을 벗고 다시 카페에 올라와 공짜 커피를 마시면서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얼마나 특이해 보였을까.
어느 날, 임용 스터디를 함께 했던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SNS에 거의 매일 즐거운 카페 알바생의 일상을 적어 올리고 있었다. 그걸 보고 연락했다며 다짜고짜 물었다. "같이 일해보지 않을래?"
스터디에서 만난 언니는 얼굴도 예쁘고 팔 다리도 늘씬했다. 나는 잘 모르지만 들고 나오는 가방은 전부 명품 가방이라고 했다. 모두가 흔히 아는 브랜드들은 아니었다. 명품 로고가 어딘가 크게 박힌 타입 말고, 이게 명품 가방인지 보세 가방인지 티도 안 나는 걸 들고 다녔다. 옷 입는 것도 뭐랄까, 굉장히 느낌 있었다. 일단 얼굴과 몸매가 되니 뭐든 멋지게 소화를 했다. 임용을 코앞에 둔, 마지막 스터디 모임에서 언니가 말했다. "난 이번 시험에서 떨어지면, 인터넷 쇼핑몰 할 거야." 벌써 10년도 더 된 얘기니까, 그땐 인터넷 쇼핑몰이 몇 개 있지도 않았을 무렵. 나에겐 너무 낯선 얘기였지만 언니는 뭐 옷도 좋아하고 옷도 잘 입고 예쁘니까, 그런가 보다 했다. 그리고 우리 둘 모두 임용에서 낙방했다.
나는 강사 일을 시작했고, 언니는 정말로 인터넷 쇼핑몰을 열었다. 가끔 지인 찬스를 써서 옷을 싸게 살 수 있으니 좋았을 뿐, 그 이상으로는 관심도 없었고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든 나는 선생님이 될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언니가 나에게 연락을 해 온 것이다. "너 학교 그만둔 거 페북에서 봤어. 우리 같이 일해보지 않을래?"
거절했다. 딱히 할 건 없지만 쇼핑몰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카페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 며칠 뒤 다시, 쇼핑몰을 함께 운영하는 언니의 남자친구가 전화를 해왔다. "만나서 얘기나 해봅시다." 뭐 만나는 거야 할 수 있지만, 일단 제안은 다시 한번 확실히 거절했다. 며칠 뒤, 또 전화가 와서는 지금 어디냐 묻는다.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겠단다. 그렇게, 언니의 남자친구와 내가 단둘이, 동대문 이디야 가장 구석 자리에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