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나의 특징은 적응하는 능력이 아닐까

by 노니

아는 언니, 아는 언니의 남자 친구가 사장님인 회사에, 나는 첫 번째 직원이 되었다. 잠깐만 해보려고 했던 거였다. 어떤 각오와 목표도 필요 없었다. '잠깐 하는 거야. 내가 할 만한, 내 수준에 맞는 적절한 일을 찾기 전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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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잘 몰랐던 게 있었다. 남자들의 이상형은 새로운 여자라는 말이 있다던데, 내 직업 이상형은 새로운 일이었던 것.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적응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어떤 환경에 밀어 넣느냐가 너무 중요한 사람인 거다. 그대로 적응해버리니까.

얼마 전 읽은 소설에서 그랬다. "혹시 나의 특징은 도망치는 능력이 아닐까? 누구나 타고나게 잘하는 일은 다르잖아. 그게 내 경우에 도주 능력인 거지. 참 잘 도망치는 사람인 거야." (정세랑 작가님의 신작 《옥상에서 만나요》중, 〈효진〉에 나오는 대사다.) 주인공은 스스로가 타고나게 잘하는 것에 다름 아닌 도망치는 능력을 꼽았다. 나도 생각해본다. 혹시 나의 특징은 적응하는 능력이 아닐까? 어떤 상황에든 적응해버리는 능력, 나는 참 잘 적응하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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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해본 적도 상상할 이유도 없는 세계에 풍덩 몸을 던졌다. 가슴팍에 찬물을 묻히며 준비 운동도 하지 않고 그냥 풍덩 빠져들었다. 물속은 낯설지만, 낯선 것이 당연했다. 첫날에는 질문에 답글을 달았고 그다음은 전화를 받았다. 그다음은 교환 환불 처리를 배웠다. 교환과 환불에 얼마나 많은 경우의 수가 있는지, 쇼핑몰에서 일해보기 전까지는 상상도 못 할 거다. 부분 취소가 있고, 전체 취소가 있다. 부분 취소의 경우, 남은 상품이 5만 원 미만이 되는 때와 5만 원 이상이 되는 때를 구분해야 한다. 5만 원 미만인지 이상인지에 따라 배송비가 붙기 때문이다. 구입했던 시기에 할인받은 옷이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이벤트 기간에 샀나, 쿠폰이나 적립금을 사용해서 구매했는가도 확인해야 한다. 암튼. 수많은 경우의 수를 배워가며 교환 환불의 달인이 되었다. 그다음은 배송이었다. 송장을 뽑고, 물건을 찾고 택배 봉투에 물건을 담아 포장하고 송장을 붙인다. 배송을 마치면 재고 정리를 하고, 택배 기사님께서 물건을 수거하면 하루 일과가 마무리되었다. 입사 한지 한두 달 만에 모두 배운 일이었다. 말할 수 없는 자잘한 과정들.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입사한 그날부터 퇴사한 날까지, 매일 바빴다.

그러는 사이, 회사는 4번이나 이사를 했고 직원은 50여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회사의 매출은 입이 떡 벌어지게 늘어났고, 나는 실장이 되어 있었다.

아, 내가 실장님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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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열심히 일했고, 그만큼 회사는 무섭도록 빠르게 성장했다. 남부럽지 않은 회사원이 되어가는 과정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한 이야기들 뿐이라 이쯤에서 그만해야겠다. 생각해보면 회사 안에서는 걸어 다닌 적이 거의 없었다. 늘 종종걸음으로 뛰듯이 걸었다. 우리 회사 바빠, 나 바빠라는 말은 푸념인 동시에 자랑이기도 했다. 평일 퇴근 후 약속은 열이면 예닐곱 번은 깨거나 미뤄야 했다. 갑자기 퇴근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결정되는 야근은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몇 년간 빨간 날을 제외하고 단 하루의 연차도 없었다. 회사에 입사한 뒤로 딱 한 번의 감기 몸살 결근을 제외하고는, 지각도 조퇴도 해본 적 없었다. 대단히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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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다르게 커져가는 회사를 보는 것은 상상보다 훨씬 더 즐겁고 짜릿한 일이었기에, 지금 다시 하라면 못할 일들을 그때는 기쁘게 해냈다. 믿어지냐고, 한 달에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야근을 하는 회사를 다니면서도 아침에 일어나 회사를 가는 게 싫지 않았다면. 일요일 밤에 '내일 회사 가기 싫어.'를 생각하지 않고 잠들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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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쓰고 미화된 부분은 없나 점검했다. 왜 없겠어. 그렇지만 미화하면 좀 어때, 싶을 만큼 회사는 정말로 성장했다. 그 성장에 내 지분을 따져 묻는다면... 없었다. 내 지분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