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의 이력서

by 노니


'견디면 달라질 거야, 버티면 성장해 있을 거야.'라고, 자주 생각했다. 지금의 이 시간은 나에게 무언가를 남길 거라고. 아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 나에게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남길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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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예상이 맞았다. 버티고 버틴 그 시간은 나에게 이력서에 채워 넣을, 경력 한 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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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초기에 사람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말하고 다녔다. 일단 4월까지 쉴 거야, 6개월이 내가 정한 마지노선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분명히 그 사이 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자신 없었지만, 자신 있었다. 4월 전에는 뭐가 됐든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만들어 낼 거라고 말하고 다녔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내 입으로 먼저. 그러니 퇴사 후 몇 개월 만에 만난 이가 묻는 건 당연했다 "4월까지는 뭘 써보겠다고 했었지, 잘 되어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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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지만 쓰는 것은 항상 어려웠다. 완성된 결과물을 남기는 것에는 실패했다. 겨울이 끝나가는 것이 느껴지자 나는 슬그머니 이력서를 내기 시작했다. 나 스스로에게 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질문이 답하기 위해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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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이가 '어떻게 지내냐' 묻기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력서를 넣고 있다고. 상대가 또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어떤 곳에 넣고 있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 질문에 나는 금세 말문이 막혀버렸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준비하기 못했기 때문. 어떤 일을 하려는지, 아니 그보다 지금 일을 하고 싶은 건지, 일을 해야만 하는 건지조차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누군가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주 엉망으로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유들은 대부분 타인의 시선에 대한 불안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런 불안하고 불안정한 마음에는 아주 단순한 질문조차 자주 공격처럼 느껴졌다. 굳이 내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들여다봤다. 젠장. 자주 성급한 후회가 시작되곤 했다. 그냥 언제나처럼 조금 더 버텨볼 걸. 뭐 대단한 걸 하겠다고 나온거야,로 시작된 후회는 곧잘 자책으로 이어졌다. 사회 생활하면서 이 정도도 안힘든 사람도 있나, 왜 그렇게 유난을 떨었지. 언제까지 이렇게 대책없이 사려는거야. 그리고나면 결국 애꿎은 나이 탓. 서른 다섯살은 그저 서른 네살과 서른 여섯살 사이의 나이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해보려 애썼지만 이너피스는 좀처럼 쉽지 않았다. 쪼글쪼글 쪼그라든 마음에는 세상 어디에도 서른 다섯살의 백수가 일할 곳은 없을 것 같았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아침이면 이 생각은 더욱 절정으로 치달았다. 한심해 한심해.


누군가에게 이 걱정을 털어놓을라치면, 더 쉬어도 된다고 벌써 왜 걱정이냐고 했다. 내가 조급한건지, 그들이 알아주지 않는건지 알 수 없었지만 내 생각과 다른 그들의 이야기는 듣기 싫었다. 나는 얼른 일을 구해야 하고, 글은 일을 하며 중간 중간 취미 삼아 쓰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라고, 사실 나는 원래 그것을 더 바랬다고 자신을 기만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끝도 없는 우울이었다. 아무 곳에서도 쓸모 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성실하지도 못했고, 능력도 없는데다가, 내세울 경력도 없고 심지어 외모도 후지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런 내가 나이까지 먹었으니 내 삶은 앞으로 지금 보다 더 좋아질 일은 없겠다는 생각까지 해봤다. 처음이었다. 비관적인 생각은 되도록 깊이 하지 않는 내가 해본, 최고의 비관적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언제나 그랬듯 회복은 단순하다. 외부의 자극에 마음과 몸을 활짝 열어 재끼면 서서히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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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을 위해 회사를 그만뒀는데, 이 일을 하면서 너무 스트레스 받아요.

제가 괜히 그만둔걸까요. 이 일이 저에게 맞는 일이 맞을까요?"

앞에서 강연을 하던 작가이자 정신과 상담의가 대답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힘들지 않을거라는 생각부터 바꿔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해도 힘들다. 삶은 원래 苦海라고. 이것부터 인정하고 가자, 그만 두고 싶어서 그만뒀지만 그만둬도 힘들거라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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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서 쓰는 걸 그만 두진 않았다. 쓰고 싶은 글도 계속해서 썼다. 하고 싶었던 일에 용기를 내 이력서를 내기도 하고, 해야 할 것 같은 일에 이력서를 넣기도 했다.


비어있는 이력서에 제목을 채워 넣었다.


새로운 일도 잘 해낼 자신 있습니다!


그 아래 경력을 써 내려갔다.


한문 시간 강사,

여성 의류 쇼핑몰 실장


생뚱맞은 두 줄의 이력, 그 아래 세부적인 내용을 채웠다. 굉장히 잡다한 일을 맡아했지만 이력서에는 최대한 이름 붙일 수 있는 일들만 썼다. 이름조차 붙이기 어려운 일들을 과감히 떼어 놓고.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지원 업무와 연관 없어 보이는 이력들을 보시고 고개를 갸우뚱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적혀있는 두 줄의 이력 또한, 서로 꽤 관련 없어 보여서 의아해하실 수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업무에 실증을 잘 느끼느냐 한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한 분야에서 4년 이상 일하면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그 일에 대한 전반적인 상황 파악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재밌게, 최선을 다했던 일들이지만 또 과감히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가장 하고 싶었던 일입니다. 새로운 일에 대한 편견과 두려움이 없는 편이라 처음부터 열심히 배우자는 마음으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녔던 회사의 첫 직원으로 들어가서 OOO억 이상의 매출을 내는 회사가 될 때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했습니다. 작은 회사를 주식회사로, 회사를 키워가는 동안 매일매일이 새로운 일들의 연속이었으나 즐거운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사장님께서는 해외 영업에 관심을 두고 계셔서 회사 내부의 일들을 총괄 관리했기 때문에 굉장한 부담감이 있었음에도, 즐겁게 열심히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저를 믿고 업무를 온전히 맡겨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시키는 것만 하는 것보다 제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며 주도적으로 일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물론 정해준 틀은 정확히 지키는 편입니다. 윗사람의 말에, 불법을 저질러야 할 상황이 아니라면 '되도록이면 되게끔'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장으로 근무하며 각종 면접, 면담뿐 아니라 직원들을 중재해야 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상사에게는 직원들의 건의사항을 최대한 실현 가능하게 전달해야 했으며, 직원들에게는 상사의 명령을 최대한 오해 없이 전달해야 했습니다. '상대를 알게 되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소통에도 마음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저의 가장 큰 강점은 새로운 업무에 대한 빠른 적응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응이 된 다음에는 전체적인 업무 안에서 해야 할 일을 파악하고 처리해 나가는 편입니다. 이 전에 근무했던 곳이 크지 않은 곳이었던 탓에 때로는 다양한 업무를 주어지는 대로 해야 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가리지 않고 맡겨진 일들을 하다 보니 전체 업무를 보는 눈이 생기고, 전체 업무 안에서 맡은 일을 보는 훈련을 하다 보니 일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직원 1명에서 50여 명이 되는 규모로 회사를 키우는데 저의 능력도 어느 정도 큰 역할을 해냈다고 자부합니다.


이전에 했던 일과 전혀 다른 업무를 지원하고 있지만 맡겨주시는 업무들을 열심히, 열정적으로 따라갈 자신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오래 일할 직장을 찾고 있습니다. 신입 직원으로 다소 많은 나이로 느껴지실 수 있지만 태도는 신입답게 열심히, 업무는 경력자같이 능숙하게 해내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학 졸업 후 10년 만에 쓰는 이력서는 쉽지 않았지만.

최대한 자신 있는 체하며, 쓰고 싶은 말들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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