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와 새 직장을 동시에 겪어내느라 조금도 짬이 없었다. 버티는 게 전부였던 여름. 그래도 잘 버텼네, 기특해. 더위는 지나갔고, 새 직장은... 직장은 뭐. 일단은 배에 올라탔으니 당분간은 항해다.
9월부터는 다시 일상을 기록해보기로 한다.
역시 나에겐 읽고 쓰는 게 제일이야. 취업했다고 허세 부리는 거다, 맞다.
1-2일 : 맑고 맑음
9월이 시작되고 바로 교회 수련회를 다녀왔다. 아름다운, 너무도 아름다운 날씨와 자연 속에서 마음이 풀어진다. 마음껏 사랑하자. 이 결심이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머리 속에 수많은 단서들이 붙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껏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나 덜 사랑할 거야, 하고 마음을 쪼이는 사이 금방 외로워진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왜 그렇게 무서웠을까 나는. 그래 봐야 조금 상처받는 것뿐인데. 세상이 무너지는 일도 아닌데.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이리 오래오래 오래도록 외로웠을까 나는.
수련회는 시드니로 다녀왔다.
물론 뻥이다. 이게 속초 영랑호 풍경이다. 이 사진을 찍고 해외 같다며 어찌나 호들갑을 떨었는지. 날이 너무 좋아서 하염없이 행복했던 날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러게, 마음껏 사랑할 사람들이 이리 많은데.
아침 산책에서 이런 풍경을 봤다. 마음속 깊이깊이 행복해졌다. 근래에 본 것 중, 손에 꼽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대형 댕댕이들이 마음껏 개울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교회 수련회를 스위스로 다녀왔다. 당연히 뻥이다.
유럽 여행을 이틀 남겨둔 서경이가, '유럽이 오늘의 이 설악산보다 덜 좋으면 어쩌지' 엄살을 부릴 만큼. 그럴 리 없지만,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이 순간은 그리 생각했을 만큼. 모든 것이 아름다웠던 설악. 나는 자연인이다를 찍었다. 저렇게 누워서 우리 위로 지나가는 케이블 카에 손을 흔들었다. 세상에나. 천국이 따로 없다. 계곡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멀리서 누워있는 우리에게, 거기 어떻게 내려가느냐고 묻는 걸 보니 넘들이 봐도 행복해 보였던 게 틀림없다.
대성리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왔다. 대성리 역에 너무 예뻐서 금방 또 행복해졌다. 마음이 느슨해진다는 건, 행복해질 일이 많아진다는 것. 좋은 거다. 암만.
3일 : 맑았다 비 옴
회사에 출근해서 바로 반차를 냈다. 허리도 아프고, 좀 쉬고 싶기도 했다. 점심 먹기 전에 가방을 챙겨 나오는데 하... 사람은 하루에 4시간 노동이 딱 좋은 것 같다. 만약 그리 된다면 우리 모두는, 누구에게나 상냥할 수 있다. 아님 일주일에 4일만 일하던가. 정말이지, 집에 어떻게 왔는지 모를 만큼 신이 났다. 빗방울이 한 두 방울 떨어진다 싶더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방구석 1열'을 보면서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했다.
밤에는 영화를 봤다. <우리들>
학교라는 곳을 졸업한 지 10년이 넘었다. 나이가 이렇게 먹었는데도 그 시간 내가 받았던 폭력, 내가 뱉어냈던 폭력들이 여전히 너무나 생생하다. 이렇게까지 오래도록, 날 것 그대로 남아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누군가는 선이 강한 거라 말하지만, 그보다는 사회화가 덜 된 거라는 말이 더 와 닿는다. 강할 수 없다. 저런 잔인함에는 누구도 강할 수 없다.
상처받았다고 다시 때리고. 또 때리면 또 갚아주겠다고, 때리기도 전부터 벼르고 있느라 결국엔 같이 놀 시간이 없네. 누굴 위한 싸움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사실은 같이 놀고 싶은 것뿐인데.
"그럼 언제 놀아? 친구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친구가 때리고, 나 그냥 놀고 싶은데…"
너무 많은 사람이 그랬겠지, 윤의 입에서 나온 말에 눈물이 펑펑 났다.
괜찮아, 상처 입히고 상처 입고 사는 거야. 겁내지 말자. 그리고 내 마음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될까 두려워 하지도 말자. '아이들 얘기네, 맞아 그땐 나도 그랬지'로 추억하기에는, 우린 평생 우리들로 산다.
4일 날씨 : 너무 맑음
2시에 대표님 인터뷰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회사 문을 열고 들어온 인터뷰어의 얼굴이 낯익다. 나도 모르게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쪽도 나를 들여다보다 눈이 똥그레진다. "은정언니!" 나를 언니라 부르는 그녀는, 보금자리에서 만났던 새 가족. 이래저래 만나지 못한 지 꽤 시간이 흐르고, 몇 년 전 한참만에 경희 언니 결혼식에서 만난 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또 몇 년이 순식간에 흘렀다. 세상에.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고 살다가, 이리 번듯하게 일을 하고, 사회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니 대견하고 반가워 와락 안아 등을 두드렸다.
송아가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사무실에 들어와 입구에 서서 날 부른다. "은정언니..." 따라 나가 엘리베이터 앞까지 바래다주는데, 이 곳이 나와 너무 잘 어울린단다. 다행이다. 어울리는 곳에 있을 수 있어서.
뭐 때문에 그리 기분이 좋았는지 알 수 없지만, 덕분에 퇴근할 때까지 벙글벙글 웃으며 일할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났을 때 반가울 수 있는 사람이라 다행이다. 그녀도 나도.
그나저나 언니라는 말이 이렇게 듣기 좋은 말이었나.
아, 기분 좋게 퇴근하는 길. 하늘이 붉고 구름이 수상하여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회사에서 15분 거리에 영화관이 있다. 당연히 걸어서.
안도 사쿠라 라는 배우에게 한눈에 반했다.
5일 날씨 : 맑디 맑음
점심을 먹고 산책을 했다.
점심시간에 주은 풍경들
아, 이런 다정한 급여 명세서라니. E는 나보다 열 살도 더 어린데 그 마음 씀씀이나 배려가 남다르다. 다정함에 다정함으로 대응하는 건 참 쉬운 일이야. 급여 명세서와 함께 온 메시지의 다정함에 놀라고, 명세서에 찍힌 숫자에 또 한 번 놀랐다. 하, 세금까지 떼고 나니 새 직장 급여가 새삼 또 낯설다.
받은 만큼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으나, 그게 어떻게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늘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내 노동력을 돈으로 환산하는 방법을 모른다. 모르겠다. 어쩌면 이미 후하게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다정함에 다정함으로'처럼 '박함에 박함으로' 이렇게 써놓고 나니 쉬운 것도 같고. 후하다 박하다, 열심히 한다 그렇지 않다. 결국 뭐든 내 기준이긴 하겠지만.
6일 날씨 : 갑자기 비, 대게는 맑음
회의를 준비하고 회의하고 다시 회의를 준비하고 다시 회의하고. 이 일의 반복이다 요즘은.
여럿이 함께하는 회의니 진행이 알차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준비한다. 잘 준비해도 본전, 회의라는 게 그렇다. 그냥 내가 준비한 내용이 오케이 되고,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는 걸로 좋은 거였다.
남에게 칭찬을 받으려는 생각 속에는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다. 혼자 의연히 선 사람은 칭찬을 기대하지 않는다. 물론 남의 비난에도 일일이 신경 쓰지 않는다.
이경미 감독의 말이다. 공감이다. 칭찬도 비난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고작 요 몇 주지만, 올 나 좀 대견해.
다음 주에 새 직원이 온다는데, 당분간 우리 모두 바쁘니 전반적인 일을 알려주기보다 그냥 바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시키자는 말에 목이 타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제가 알려드릴게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내가 뭘 하는지 알고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젠장, 가만히 있기로 해놓고 또 나댔다. 이쯤 되면 병이다 병. 신입 직원을 신입 직원이 커버하겠다고 나섰다.
이러니 사람들이 나이 많은 신입을 불편해하는 걸까, 잠깐 혼자 생각해봤다.
대만 타이거 밀크티 되게 맛있다.
오늘의 북토크는 이 한마디로 정리해봅니다. "제 취향과 변태성이요?"
감독님의 '취향'과 '정체성'의 형성에 대해 묻는 독자의 질문에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물어보셨다. 변태성이라니요. 깔깔깔. 팔다리도 길쭉길쭉하고 뭔가 차분하고, 멋지시다. 강연에서 좀처럼 질문을 못하는 내가 끝까지 입 속에만 가지고 있었던 질문. 결혼하시고 난 뒤, 감독님의 영화 속 여자 주인공들에게 변화가 좀 있을까요? 감독님 영화 속에는 자기가 예쁜 줄 모르고, 사랑받아본 경험이 없는 여자 캐릭터들이 나온다고 티브이에서 말하는 걸 들었는데 말이지.
책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든다. <잘 돼가? 무엇이든>
7일 날씨 : 오늘도 맑음
아침부터 그리 신이 날 수 없었다. 금요일, 그리고 가을. 주말에 딱히 할 건 없지만 주말이 좋고. 가을에 딱히 할 건 없지만 가을이 좋고. 퇴근 후 딱히 할 건 없지만 그래도 퇴근이 좋아. 완연한 회사원 마인드다 주말이 좋은 걸 보니.
내 앨범에 담아 놓은 곡들을 들으며. 우앙 신나.
딱 작년 이맘때, 나는 퇴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음은 다소 복잡했지만 몸은 여유로워 가을을 참 제대로 누렸었다. 분명한 건, 작년의 가을도 참 좋았지만 올해의 가을은 더 좋을 거라는 거. 뭐든 누리는 사람의 몫이지.
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오늘 이경미 감독님 북토크에 다녀왔단다. 어제 내가 하고 싶었다고 적어 놓은 질문을 본인이 대신했다며, 그 대답을 전해준다. 재밌는 친구다 정말.
한 주가 이렇게 갔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풍성했다. 이유를 알겠다. 모든 게 날씨 탓.
그냥 눈을 뜨는 게 행복한 날씨다 이 정도면. 기가 막히는 더위를 견뎌낸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선물. 크.
누리자 우리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