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아늑한 안나의 아파트 : 리스본의 첫날밤

by 노니

도착했으니 새로운 숙소를 둘러봐야지.

Ana가 아파트 여기저기를 소개해주고 마지막으로 3일을 머물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아...!

호스트가 방 문을 닫고 나가는 순간 긴장이 풀려 비 맞은 겉옷을 벗어재끼고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방은 정말 손바닥 만했다. 천장이 한눈에 다 들어올 정도니. 싱글 침대 하나 침대 옆 조명을 올릴 테이블 하나, 긴 테이블과 의자, 창문이 전부다. 근데 벌렁 누운 침대가 꽤 폭신하고, 이부자리가 깨끗하고 꽤 좋은 냄새가 난다. 일단 비 오는 리스본 거리에서 헤매지 않고 찾아온 걸로 좋다. 예쁜 Ana와 유쾌해 보이는 Gil의 첫인상이 좋았으니 됐다. 3일을 머물 곳이니 이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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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서 옷가지를 챙겨 씻으러 갔는데 물을 틀어 놓은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찬물만 나왔다. 벗어놓은 옷가지를 다시 주어 입고 안나를 불렀다.


안나아-


온수를 연결하는 곳에 배터리가 다 달았단다. 연신 미안하다며 이제는 괜찮을 거라고 씻으러 들어가라는데 찬 기운이 이미 몸에 가득해서 옷을 벗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참만에 용기 내서 다시 목욕재계, 여전히 시원찮은 온수가 졸졸 나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노곤노곤하게 데피고 싶었는데 실패. 간신히 씻고 나왔는데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지 맛있는 냄새가 집안에 가득했다.


나도 밥 먹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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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안 첫 번째 집이었다.


오르막 초입이라 다행, 또 골목 끝 맞은편에는 한창 힙한 카페가 있어서 늘 사람이 많아 다행. 처음엔 몰랐지만 며칠 있으면 있을수록 위치가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바로 집에서 5분도 안되는 거리에 평이 꽤 좋은 식당이 있어 찾았다. 구글맵에 스무 개도 넘는 한국인 리뷰가 있는데 하나같이 칭찬 일색이니 고민 없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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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de dos Mares]


특이하게도 도착하면 오른쪽 위쪽에 있는 벨을 눌러야 한다.


사실 이 식당을 알게 된건 <당신의 포르투갈은 어떤가요>를 통해서였다. 여행지에서 새로운 식당을 포기하고 매일 가고 싶게 만드는 식당이라니, 게다가 그게 내 숙소 근처에 있다니. 럭키. 첫 날밤에 들러야지 했던거였다. 그런데 그 책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게 있었다.


메뉴판에 있는 모든 메뉴를 먹어볼 기세로 오후 여섯 시만 되면 가게 문 앞에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p140>


초인종? 무슨 말이지 초인종이라니. 이전의 포르투갈 여행에서 딱히 초인종 누르는 가게를 본 적이 없었던터라 이 문장이 굉장히 낯설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말이지. 정말 초인종이 있다. 하하. 이거구나. 이걸 말하는거였어. 직접 가보니 알겠다.


한참만에 나온 서버가 예약을 하고 왔냐고 묻는다. 아 비 오는 리스본의 첫날밤에 까이기는 싫은데... 기웃기웃 안쪽을 보니 영 자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다행히 나를 들여보내주고 입구 쪽 자리밖에 없다고 했다. 상관없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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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플 소스가 있길래 식전 빵이랑 함께 먹으려고 시켰다. 화이트 와인과 문어. 첫날이니 문어를 먹어야지. 지난번에도 포르투갈의 첫 번째 식사는 문어였다.


내부에는 외국 손님 한 팀과 한국 손님 한 팀이 먼저 와 있었는데 식사 내내 한국말이 들려와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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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다.

야무지게 잘라 한 입 쏙 넣었을 때 흡... 소리가 나왔다. 맛있어서. 그러게 이런 식감이었지. 안은 보들보들 겉은 바싹 구어진 씹을수록 즐거워지는 맛. 함께 나온 마늘과 함께 촵촵. 큼직큼직하게 잘라먹었다. 빈속에 와인이 들어가니 몸이 홧홧 따뜻해졌다. 야무지게 소스까지 다 발라서 먹고 빵도 거의 먹고 다 먹고 나서야 식사가 끝났다. 물 잔이 비워지기 무섭게 서버가 와서 물을 담아주고, 음식에 대한 와인에 대한 설명도 친절하다. 게다가 식사를 마치면 빌지를 가져와 달라고 누를 수 있는 호출 벨이 테이블마다 있다. 나름 최신식인 듯.


배도 고팠고 맛도 있었고 천천히 좋은 식사를 마쳤다. 밥을 먹는 동안 몇 테이블 정도 더 채워졌고 나보다 먼저 왔던 손님들도 계속 와인과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 보다 식당 안도, 내 속도 온도가 조금 더 올라가 있었다. 나도 첫날의 어색함과 낯섦으로 인한 약간의 긴장감만 아니었더라면 와인을 한 잔 더 마셨을 텐데.


이렇게 먹어서 28.5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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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쳤다. 물을 사러 길 건너 식료품점에 들렀다.

어! 반가운 게 보여서 집어 들었다. 쬬코 우유. 지난번 리스본 여행 때 자주 마셨던 간식이다. 물 1.5리터도 구매.

바로 숙소로 들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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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아파트, 기다란 열쇠를 휘적휘적 돌려 문을 열고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이 정도의 가파름이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벌써 아파트 안이 조용했다.

아까 제대로 못 봤던 거실을 다시 한번 구경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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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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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늑한 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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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에 잠깐 앉아 핸드폰을 보다가 방으로 들어가서 그냥 골아 떨어져 버렸다. 정말로 순식간에 이불 속으로 파묻혔다.


그리고 새벽 1시도 안돼서 다시 깼다. 몸은 피곤한데 정신이 점점 말짱해져서 일어나서 책을 조금 읽었다. 그리고 3시쯤 다시 잠이 들어서 그때부터는 1시간, 30분, 40분 간격으로 깼다 잠들었다를 반복.

밖이 아침 7시 넘어서까지 깜깜하기에 그냥 계속 누워 있었다.

방이 좁아 그런지 추운 줄도 모르고 잘 잤다.


언제 어두웠냐는 듯, 갑자기 확- 바깥이 환해지길래 일어나서 거실로 나갔다.

안나와 길은 어젯밤에도 일찌감치 방으로 들어간 것 같더니 아직 자는지 세상 조용하다. 계속 반은 깨어 있었던 상태니 나가는 소리를 못 들었을 리는 없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세상 조용한 호스트들이었다. 말소리 크게 나는 거 한번 듣질 못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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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빛이 좋은 아침이다. 아늑한 풍경이다.

그저 낡기만 한 아파트가 아니었다. 호스트들의 손길로 섬세하게 꾸며진 아늑한 공간이었다.

차를 한 잔 끓여 나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몸이 따뜻해진다.


리스본에서의 첫날 아침,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리스본 속으로 들어갈 생각이 들질 않는다. 아, 이미 리스본 속이지만. 하하.


새벽에 깨서 오늘 일정을 생각하다가 그냥 외곽부터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오비두스다. 서둘 것도 없다. 천천히 다녀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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