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사랑스러운 : 리스본에서 오비두스로

by 노니

리스본에서의 첫 번째 아침, 오비두스에 가기로 했다.


처음 리스본에 왔을 때는 눈 돌아가게 예쁜 골목들을 헤매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더랬다. 그래서 근교 여행은 커녕 30분 거리에 있는 벨렝에 갈 마음도 잘 생기질 않았었다.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음번에 리스본에 오면 가보지 뭐 했었는데. 세상에, 이 먼 포르투갈에 다시 왔다. 그것도 생각보다 빨리. 이번엔 어디고 생각나는데로 가보고 싶은 곳부터 가볼 작정이었다.


오비두스는 리스본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오비두스는 '성곽'을 뜻하는 라틴어 오피둠(oppodum)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당연히도 마을에는 성곽이 있었다. 1228년 디니스 왕이 왕비 이사벨에게 오비두스를 소개했을 때 왕비는 이 마을에 한 눈에 반했고, 왕은 왕비에게 기꺼이 이 마을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왕비의 마을’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오비두스. 그 사랑스러운 풍경을 이미 여러 블로그에서 충분히 봤지만 내 눈으로도 직접 보고 싶었다. 그 노랗고 파란 집들과 낡고 바랜 골목들을.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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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의 유럽은 처음,

오늘도 비가 온다. 어제만큼은 아니고 보슬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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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예쁘다.

집에서부터 Cais do Sodré역까지 가는 길, 거의 매일 몇 번씩 걸어 다녔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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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다 무너져가는 건물들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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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렇게 초현대적 멋을 잔뜩 부린 건물이 나오기도 하는 게, 이게 바로 이 도시의 매력.


나중에 확인해보니 여기 우리나라로 치면 한전, 그러니까 포르투갈 전력 공사 건물이란다. 건물 되게 독특하고 엄청 크고 멋지고, 안 봐도 뻔히 내부도 멋들어질 텐데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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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건너편에는 이런 풍경. 벽이 있으니 낙서가 있다. 거의 그런 수준.

과장 조금 보태서, 아주 새 건물을 제외하고는 낙서 하나 없는 벽을 찾기가 힘들다 할 정도로 이런 풍경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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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 분위기 있어. 흐린 아침.

그냥. 길이 너무 예뻐서 여기 한참 서서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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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색 지하철을 타고 10정거장을 후딱 지나 Campo Grande 역에서 내렸다. 오늘도 리스본에서 이동할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일회 사용 가능한 금액만 충전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서 한 3분 거리에 오비두스에 가는 버스 정류장이 있다. 구글맵에서 'bus stop for obidos'라고 검색하면 버스 정류장의 위치가 나오더라. 대박. 기특하게도 미리 블로그에서 버스 시간 정보를 검색해보고 대강 맞춰서 나온 거였는데 이상하다. 도착해보니 내가 어제 봤던 시간표랑 좀 다르다. 검색했던 블로그에 들어가보니 무려 2017년의 블로그. 2년 사이에 시간표가 변할... 만 하지. 아니 어제 밤의 나, 정보는 최신순 검색 모르냐고.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9시 30분 버스를 탈 계획이었는데 10시 버스를 타야 할 모양이다. 50분 정도 여유 시간이 생겼다. 그렇다면 이것은, 커피 타임.


혹시나 필요하신 분이 있을까 하여 2019년 2월 현재의 버스 시간표 공유. 버스가 꽤 자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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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 가량, 두 정거장을 가면 오비두스에 도착한다. 편도 7.95유로. 버스 타면서 기사님께 표를 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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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역 쪽으로 나와 주변에 뭐가 있는지 슬쩍 둘러봤는데 저어쪽에 카페가 보인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내부가 꽤 크고 모닝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꽤 많알다.


어리바리 입구로 들어서는 내게, 카운터에 앉아 있던 점원이 종이를 한 장 건넨다. 이건 뭐지 당황스럽게스리. 낯선 상황에 지나치게 긴장하는 걸 보니 아직 여행 모드로 전환이 안되었나 보다. 이게 뭐냐고 바로 물어보면 얼마나 좋아, 소심한 마음이 발동해서 주변 사람을 지켜보는 쪽을 선택했다. 옆에 있는 사람 2명을 한참 스캔한 뒤 똑같이 다가가서 주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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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싶은 빵과 라테 한 잔을 주문했다.

빵 종류 짱 많고 음료 종류도 완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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걍 주문서였다. 뭣도 아니었음. 라테 1.1유로. 빵 1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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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니 금세 커피와 빵을 가져다주셨다. 그러고 보니 리스본에서의 첫 라테구나. 익히 알고 있던 밍밍한 맛, 그래도 따뜻해서 맛있었다. 거기에 신선한 아침 빵. 이런데 뭐 굳이 맛을 따질 이유가 있나. 그냥 여유 있게 아침 기분을 내며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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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

입구 카운터로 가서 아까 받은 주문서와 돈을 내면 된다. 이런 거 일일이 설명하지 말라고오. 2.1유로의 아침.

시간표를 잘 못 알고 온 바람에 모닝 라테를 했다. 운이 좋은 걸.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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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elaria Dour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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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는 아무도 없었는데 버스 탈 시간이 다 되어서 다시 오니 사람들이 꽤 늘어서 있었다. 시간이 되니 큰 버스가 한 대 들어온다. 차례차례 버스에 올랐다. 10유로를 건네며 말했다. 원 티켓, 플리즈. 원? 하고 되묻기에 고객을 끄덕였다. 원, 원, 온니 원.


사람이 많아도 한 명 한 명, 묻는 말에 답하고 서둘 것도 재촉할 것도 없이 표를 끊어주다 보니 10시가 한참 넘어서 출발했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승객이 앉기 전에 출발하는 버스는 정말 우리나라뿐인가 봐.

거의 줄 끝에 서 있던 탓에 내가 올라타니 뒷자리가 은근히 다 찼다. 그냥 맨 앞자리에 앉았다. 왼쪽에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자분이 혼자 앉아 계셔서 3초쯤 고민하다가 출발 전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한국 분이세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곤란한 얼굴로 손을 흔드셨다. 아, 중국인이셨다. 혼자 다니는 중국인은 정말 드물어서 완벽히 오해했다. 하. 서둘러 앞을 보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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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옆자리에는 호호 할머니가 앉으셨는데 알고 보니 이 맨 앞자리는 노약자석이었다. 오비두스에 도착해서 내리다가 노약자 표시를 발견한 바람에 올 때는 뒤에 앉아 왔다. 사진에 잘 안 나왔지만 내 옆자리 호호 할머니는 코팅진에 가죽 장갑을 끼고 계셨다. 겁나 멋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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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기사님 엄청 잘 생겼었다. 셔츠의 팔뚝 저렇게 꽉 낄 일인지. 내가 차마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표 끊을 때 옆에 섰는데 단추 사이사이가 벌어져서 속이 좀 들여다 보였달까. 자기 몸 좋은 거 너무 잘 아는 사람의 셔츠 사이즈 선택. 다급함이 느껴지는 사진이고만. 한쪽 구석에 손가락이 같이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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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두스까지 가는 길은 참 예뻤다. 버스는 신나게 씽씽 달렸고, 비는 오다가 그치다를 반복했다. 맨 앞 명당자리에서 버스 앞 큰 창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는데, 앞 차가 물보라를 가르며 자꾸 무지개를 만들어냈다.

아 평화로와라. 드륵, 진동이 울려서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서울서 회사 동료에게 카톡이 왔다. 내용을 확인하기도 전에 갑자기 심장이 조금 빨리 뛰기 시작했다. 막연히 생각했던것 같다.


나 뭐 실수하고 온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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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왜 이러나 몰라. 나 진짜 왜 이럴까.

평소에 무슨 대단한 실수를 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뭔가 나의 큰 실수라도 발견될까 봐 그랬는지, 카톡 하나에 갑자기 확 긴장이 되었다. 안 열어 보고 싶었지만 느릿느릿 카톡창을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몇 차례 디링 디링 올라가는 메시지는 우려했던 대로 내 실수에 관한 내용이었다. 휴가 떠나는 날, 마지막으로 통화한 고객의 요청 사항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었나 보다. 분명히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안 되어 있었나 보다. 근데 그러면 뭐, 확인하고 사과하고 처리하면 그만이다. 동료에게 처리해 주십사 부탁하면서, 순간 슬그머니 짜증이 났다. '아니 뭐 이걸 여행 온 사람한테 확인까지 하나. 누락된 거 확인했으면 처리 그냥 해주지.'

순간 드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다. 미쳤어. 이게 문제다. 혼자 긴장하는 거야 성격이 소심한 탓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지나치게 예민해진 마음은 정말이지 괜한 원망을 만들어낸다. 엄한데 탓을 돌리려고 한다. 실수 자체보다도 이게 문제다. 확인해준 동료가 무슨 잘 못. 내 실수를 잘 처리까지 해준 인데. 얼른 다시 창을 열어 감사를 전했다. 잠깐의 비정상적인 원망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서로 연휴 잘 보내자고 인사를 건네고 톡을 마무리했다.


이상하다. 새 직장에서 나는 지나치게 위축되어 있다. 위축되어 있는 마음은 자꾸 주위를 힐끗거리게 만들고 별것 아닌 일에 마음이 무너지게 만든다. 누군가 자꾸 원망할 대상을 찾고 만다. 지나치리만큼 내 영역을 선 그어놓고 그 안에서 몸을 사리고 있으면서 선을 넘어오지 않는 사람들이 나를 고립시킨다고 생각해버린다. 자꾸 발 빼려고만 하면서 내가 책임감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또 견딜 수가 없다. 엉망진창이잖아. 객관적으로 이렇게 다 알면서도 나는 위축되고 쪼그라든 마음을 좀처럼 펼칠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엉망이 된거야. 아닌가. 원래 그랬었나.


카톡을 마치고 멍하니 창밖 풍경을 내다보는데 듣고 있던 팟캐스트에서 이런 말이 흘러 나온다.

"니가 날 불렀고, 날 보낼 수 있는 것도 너야."

"나를 똑바로 봐. 그리고 잘 생각해봐. 너한테 왜 내가 왔는지."


<그녀석, 걱정>이라는 그림책의 한 대목이란다.


여기서 '나', 이 말을 하고 있는 대상은 '걱정'이다.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불러낸 건 나, 그리고 그 걱정을 끝낼 수 있는 것도 나다. 그래 나다. 하지 않아도 될 근심 걱정들을 하느라 집에 오면 녹초가 되는 시간들을 한동안 보냈다. 왜 이렇게 마음이 망가졌는지 잘 생각해봐야 하는데... 이렇게 나를 녹다운 시키는 팟캐스트 속의 멘트들을 들으며, 별 수 있나. 별 저항 없이 몇 번이나 녹다운 되었다. 울렁이는 마음으로 오비두스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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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비가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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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두스의 첫인상.

낡았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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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았다. 정말이지 수수하다. 사랑스럽다. 그리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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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모두 마을로 향하고 있는데 나만 아직 버스 정류장 근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풍경들이라서. 어디 하나 빤질거리는 새 것은 없는데 그래도 충분히 새로운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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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떼면 또 금방 눈을 사로잡는 풍경을 만났다.


이렇게 소박하고 낭만적인 풍경을 마주하니 팽팽해졌던 내 신경들이 금방 느슨해진다. 지금은 그냥 이렇게, 차분한 풍경을 눈으로 쫒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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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그 자리 그대로. 마을 입구를 서성이고 있었다. 마을 입구인 성벽을 눈 앞에 두고도 발을 뗄 수가 없다. 안에는 얼마나 얼마나 더 많은 풍경들이 있을까. 오늘은 이 작고 사랑스러운 마을에서 마음껏, 사랑스러움을 누릴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