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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니 Nov 03. 2019

01. 자신이 생각하는 농촌에 대해 말해주세요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농촌'에 대해 말해주세요. 정답이 있는게 아니니까 편하게 말해주시면 돼요."


지역으로 내려가 일할 청년을 뽑는 자리였다.

이제 생각해보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질문이었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당황스러웠을까. 잠깐 머리가 멍해졌다. 좀 전까지 농촌과 도시를 연결하는 문화 기획과 콘텐츠에 대해서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이야기했지만 정작 '농촌'을 묻는 질문에는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농촌이라...'


뒤늦은 고민을 시작한 사이, 한 지원자가 ‘모든 것의 기본이 되는 땅, 대지'라는 키워드로 가장 먼저 농촌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내내 똑부러지게 대답을 해왔던 지원자가 '생명'이라는 키워드로 답변을 시작했다. 나머지 한 명은 무슨 대답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점점,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다른 지원자들의 답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세 번째 지원자의 답변마저 끝나고, 면접관들의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로 향했다. 꿀꺽.


"…며칠 전 다큐멘터리 하나를 보게되었습니다. '쓸모'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나도, 정리되지 않은 답변을 시작해야 했다.


_


며칠 전 내 Sns에 올려 놓은 글 하나를 읽었다. 퇴사 후 구직 기간이 길어지며, 종종 찾아오던 무력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의 기대에 대해 적은 글이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것 뿐인데, 쓸모 없는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자주 사로 잡히던 시기였다. 나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소속된 회사에서 인정받는 것에 두고 있었던걸까. 회사를 벗어난 나는 참으로 무력해지곤 했다. 그 글 밑에 댓글이 하나 달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SBS스페셜 제작진입니다. 이번에 저희가 '쓸모'라는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경제력에 얽매여 있는 '쓸모', 타인이 판단해주는 '쓸모'가 아닌 오롯이 나 자신이 판단하는 '쓸모'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이에 '쓸모'라는 단어를 검색하던 중 선생님의 브런치를 보게 되었고 전화로 평소 '쓸모'에 대한 생각을 여쭈고자 이렇게 메시지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아. 한참 전에 달린 댓글이었다. 내가 필요한 때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진 못했지만, 그 다음이 궁금해져 SBS 스페셜의 회차를 훑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보게 된 다큐멘터리었다.


자신을 '집사'라고 부르는 빈센트는 눈을 뜨면 자신이 먹을 빵을 굽고, 필요한 화분 받침은 직접 만들어 쓰며, 살고 있는 집을 자신에게 맞게 2년이 넘게 다듬고 고치는 등, 남들이 보기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불편한, 또는 피곤한 삶을 살고 있었다.


미국에서 태어나 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던, 전도 유망한 청년 빈센트는 인종 차별 주의자 상사에 의해 무능한 존재로 음해 당하다가 결국 회사에서 해고까지 되고 만다. 부당한 해고에 대해 소송을 하고, 승소하기까지의 긴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의 쓸모'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타인이 마음대로 나의 쓸모를 판단해 버린 때에 그는 스스로, 나의 쓸모를 찾아가고자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계속 자신의 손을 직접 움직여 더디고 천천히, 필요한 것을 몸으로 직접 익혀가며 스스로 질문에 대한 답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속 빈센트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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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이라는 질문을 받고 나는 왜 갑자기 빈센트의 건강한 몸과 마음이 떠올랐을까. 아직 생각이 정리되진 않았지만, 뭔가 대답을 해야 했다.



"저를 비롯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쓸모를 생각할 때 타인이 정해놓은 기준에 휩쓸리기 쉬운 것 같습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내가 지금 무엇을 소유했느냐에 따라 자신의 쓸모를 셈하는 방식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소속도 영원하지 않고 소유 또한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수시로 자신의 쓸모를 고민하게 됩니다. 제가 생각하는 농촌은 자신의 몸을 움직이고, 몸으로 익힌 기술로 삶을 꾸려가는 것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내 막연한 답변이 면접을 통과했는가보다. 며칠 후 최종 합격 문자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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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hing on the ice, Pekka Halonen, 1900>



그림 속 여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림 속 여인은 표정이 명확하지 않다. 흐릿하다. 그래서 얼마든지 상상의 여지가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시간, 아름다운 풍경 속, 맑고 깨끗한 물에 묵은 빨래를 하고 있는 여인은 뿌듯하고 개운하고, 상쾌해보였다. 내 생각에 누군가가 코멘트를 달기 전까지 내게 그녀는 완벽히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더 없이 충만한 사람으로 보였다. 누군가가 그림 속 여인에게서 삶의 고단함이 보인다고 했다. 그제야 내 눈에 '낭만'의 필터가 걷혔다. 아름다운 풍경 속, 아니 그림 속 그녀의 생업이 내게는 이렇게나 막연했다. 어느 추운 날, 찬물 손빨래를 해본 이라면 이 여인이 어떻게 보였을까. 누군가의 빨래를 해줘야 하는 삶을 사는 이라면 이 여인이 어떻게 보였을까. 우리 엄마라면 이 여인이 어떻게 보였을까.


스스로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몸으로 익힌 생활 경험의 부족은 이런데서 불쑥 티가난다. 생활에 가까이 다가가본 적 없어서 막연해지는 관찰자는 마음대로 미화시키거나, 쉽게 두려워한다. 그리고 미화시키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어쩐지 모두 부끄러워지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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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나에게, 몸으로 직접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꼭 지역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차원적인 사고로, 직접 몸을 움직여 일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은 지역을 선택했다. 막연하고 거창한 말이지만 지금의 선택이 내겐 이 정도의 느낌이니까.


천천히 꾸준히 몸으로 익혀나가는 생활 기술자가 되고 나면 그림 속 그녀는 내게 어떤 표정을 보여줄까. 앞으로의 시간을 내 방식과 소망대로 정직하게 몸에 새겨가며 살아내자고 다짐했다. 아마도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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