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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니 Nov 17. 2019

13. 여기 안전한 곳인가요?


내가 일하는 협동조합은 폐교에 사무실이 있다.


현재 학교로 운영되고 있지는 않지만 여느 학교보다 더 제대로 학교다. 매일매일 각종 수업과 배움이 일어나는 곳. 어른들의 놀이터 같았던 이 학교에 온 지 한 달여, 학교가 눈에 익자 이곳을 드나드는 몇몇 청소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애프터스콜레를 하고 있는 아이들. 애프터스콜레는 초등, 중등 교육과정을 마친 뒤 고등 교육과정을 이수하기 전 일정 기간 학업에 대한 부담 없이 자신의 적성과 재능에 맞는 진로를 찾아가는(=쉬어가는) 제도를 뜻하는 말이다. 덴마크에서 시작되었다는 이 개념을 가져와 ‘한국형’애프터스콜레라고 이름 붙인 것까지 봤는데 봤는데 이곳은 당당하게 <'OO형’애프터스콜레>라고 지역명을 붙이며 스스로의 독자성을 자부한다. 


일 년쯤 쉬어볼래? 그래, 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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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래의 수업 중 <김수박 선생님과 함께하는 인생수업>이 궁금했다. 혹시 참관이 가능한지를 여쭙고, 허락을 받은 뒤 수업에 들어갔다. 김수박 선생님은 만화가다. 나는 잘 몰랐지만 한겨레신문에도 만화를 연재하셨던 꽤 유명한 분인가 보다. 일단 애프터스콜레에 다니는 아이들이 궁금했고, 또 <인생 수업>이라는 제목의 수업도 궁금했다. 오랫동안 뭔가를 배워왔지만 인생을 배워본 적은 없어서. 근무시간 중간에 있는 수업이었지만 동료분들이 모두 ‘지역자원개발’을 위한 것(?)이라며 듣고 오라 셨다. 흑. 우리 동료들 좀 최고. 


교실에 들어가 <인생수업>을 들으러 왔다 하니, 선생님이 쑥스러워 하시며 원래 제목은 <인생 겉핥기>라고 하신다. 하하. 겉핥기도 좋아요. 아주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다. 자기소개는 오로지 참관 학생인 나를 위한 것. 수업은 총 3단계로 이뤄진다. 1단계 근황 토크, 2단계 주제 토크, 3단계 만화 그리기. 


근황 토크 시간에 들은 아이들의 근황이 재미있다. 그날 수업에 참석한 아이들은 총 3명이었는데 3명 모두, 한 주간 '행사'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아이들은 그동안 수업에서 배운 커피 기술로 행사에서 커피나 음료를 팔고 있었다. 또 그것 외에도 각자의 비장의 기술들이 있어서 그 기술을 가지고 행사를 다니며 돈을 좀 벌었다고 했다. '기타', '몸만들기' 등 그때그때 자신들이 관심 있는 분야를 가르쳐 줄 사람을 찾아서 수업을 만들고, 수업에 푹 빠져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지금 셋이 푹 빠져 있는 건 단연 '몸만들기'인 듯. 이틀에 한 번씩 청소년 체육센터에 가서 헬스를 한다며 자기 가슴을 툭툭 친다. 그 몸 만드는 남자들이 하는 특유의 제스처. 


수업은 자유로웠다. 아이들은 앉아 있고 선생님은 강의를 했다. 그럼에도 자유롭다고 느껴졌던 건, 형식도 주제도 얽매여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시간조차도. 나머지는 여느 학교와 비슷한 풍경이다. 아이들은 산만하고 흥미 있는 얘기가 나오면 반짝 앞에 있는 선생님을 쳐다봤다가, 흥미가 떨어지면 금세 고개를 숙이고 쓸데없이 친구를 쿡쿡 치거나 딴짓을 했다. 여느 아이들처럼.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선생님이 나에게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서 아예 이 지역에 정착하는 것도 좋겠다는 말을 하셨다. 그랬더니 아이들 중 하나가 손으로 엑스 자를 만들면서 자긴 반대란다. 도대체가 여긴 놀게 너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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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있다 아이들이, 유럽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고 싶다는 얘기를 하자, 선생님은 나이 먹으니 비행기가 무서우시단다. 일본은 방사능이 무섭고 유럽은 테러가 무섭고, 해외도 뭐 대단한 거 없더라고 그래서 이제 그냥 한국이 편하다 말하니, 아이들은 시시하다는 듯 낄낄 선생님을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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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었다. 

우리는 결국, 내가 경험해본 것에 대해 알게 된다. 뭐 별것도 없다는 것.

해외여행을 해보기 전엔 마냥 설레고 기대하지만, 경험해보고 나면 알게 된다. 여행은 물론 짜릿한 것이지만 뭐 대단한 것도 없다는 것.

지역에 살다 보지 않은 나야 마냥 설레고 궁금하지만, 살다 보면 알게 될 거다. 여기라고 뭐 별것도 없다는 것. 


놀 것도 없는 이런 동네. 

여기저기 다녀보니 별것 없는 해외.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경험 뒤에 알게 된다.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쉽게 동경하거나, 쉽게 두려워하게 마련이다. 


수박 선생님이 그랬다.

늘 산 너머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하는 게 인생이고, 넘어가 본 뒤에 별거 없네 시시해 하는 게 경험이 최고 효용이라고.


수업을 마친 후 각자 한 장짜리 만화를 그렸다. 정말 놀라운 건, 칠판에서 눈을 떼지 않고 제일 열심히 수업을 들은 나는 뭘 그려 할지 몰라 머뭇대고 있는데 듣는 둥 마는 둥 건성이었던 아이들은 금세 슥슥 뭔가를 그려내기 시작한다. 맞아. 애들은 이랬지. 늘 하나도 안 듣는 거 같아도 다 듣고 있고, 하나도 모르는 것 같아도 다 알고 있고. 





나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산 넘어 물 건너의 세상에 대해 궁금해하듯, 나 또한 산 넘어의 세상이 궁금해 이곳에 왔다. 내 인생 노선도에 없던 곳에 도착했다. 와서 보니, 노선도에 없던 이곳도 안전했다. 안전했다. 결국 늘 확인하고 싶은 건 ‘안전한 곳인가요?’였다. 이곳이라 불안했을까, 다만 노선을 벗어나는 인생이 불안했겠지.


좋은 수업이었나 보다. 내 인생에 대해, 이렇게 혼자 생각이 많아진 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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