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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 Oct 31. 2020

나의 왁싱기

 

여름은 바캉스의 계절이자 동시에 제모의 계절이다.

평소에는 겨드랑이와 속옷 사이로 털이 삐죽삐죽 안테나처럼 튀어나와도 무시하고 지내지만 여름이 오면 그동안 미뤄두었던 털 관리를 시작한다. 나는 여름휴가를 가면 꼭 비키니를 입는데 회음부는 셀프 관리가 어려워 왁싱샵을 방문했다. 미리 관리를 받음으로써 마음 편하게 비키니를 입을 수 있었다.


나는 해마다 여름이 오면 연례행사처럼 브라질리언 왁싱을 했다. 그러다 작년 여름, 평소와 같이 관리를 받다가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하다. 왁싱을 받던 중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시술에 방해가 될 것 같아 거절 버튼을 누르고 급하게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왁싱 중"

그런데 문자를 보내고 나서야 알았다. 그 문자가 남편이 아닌 한 학부모님께 날아갔다는 사실을.


머리가 하얘지고 손이 떨렸고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

'문자는 왜 삭제 버튼이 없단 말인가?'

학부모님이 상상의 나래를 어디까지 펼치실지 두려웠고 사건이 부풀려져서 다른 학부모님에게까지 일파만파 퍼질까 봐 겁났다. 일단 사태를 최대한 수습해야 했고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다행히 왁싱 중이라고만 보냈어. 무슨 왁싱했는지 모르시잖아? 평화야 괜찮아. 누가 봐도 티 나게 눈썹 왁싱을 받으면 돼.'

 그렇게 두근거리는 내 마음을 다스렸다. 그리고 학부모님께 문자를 보냈다.

"죄송합니다. 제가 남편....(지우기 버튼)"

'남편에게 보내려 했던 문자라고 하면 왁싱 부위를 오해할 수도 있겠지? 친구라고 해야겠다.'

"죄송합니다. 친구에게 답장한다는 게 어머님께 날아갔네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그 날은 정말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자 나를 위로해주며

모두가 한마음으로 대답했다.

"괜찮아 괜찮아. 평화야 눈썹 왁싱이 답이다."


나는 그날 생각지도 않은 눈썹 왁싱까지 받았고 내일을 기약했다. 그런데 출근 중에 어제 그 학부모님께서 연락이 오셨다.

"오늘 제가 사정이 생겨서 못 갈 것 같아요. 죄송해요."

불행인 건지 다행인 건지 그렇게 그 사건은 조용히 끝났다.


그 날 꽃단장에는 성공했을 지 몰라도 변명거리를 생각하느라 내 여가시간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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