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 많은 유목민 Jan 15. 2021

낯선 위로(알 수 없는 세상)

# 기승전 여행 01

낯선 위로  


# 1. 이것들 가만 두나 봐라  

# 2. 자의반 타의반으로 어색한 천사의 탈을 쓰다

# 3. 뜻밖의 즐거움을 만나다

# 4. 생(生)과 사(死)의 현장에서 현재(現在)를 묻다. 

# 5. 그럴 수도 있다  


  

# 1. 이것들 가만 두나 봐라    

 

    째깍째깍! 시간은 흘러가고, 바짝바짝 속은 타들어 갔다. 기차 출발 시각은 다가오는데, 햄버거를 사러 간 재현이와 영미는 1시간째 행방불명이었다. 그들은 장장 16시간을 타고 가야 하는 지루한 기차여행을 위로해 줄 맛있는 치킨버거를 사 오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연락할 방법조차 없었다. SNS 활용이 활발하지 않았던 12년 전, 우리는 자신을 옭아매는 휴대폰 따위는 한국에 버려두고 저마다 장기여행을 떠나온 방랑객들이었으니까. 

    사고가 아니기를 바라며 기다리던 초조한 시간과 함께 우리가 예약해 놓은 뉴델리발(發) 바라나시행(行) 기차는 속절없이 떠나버렸다. 솔직히 열차 바퀴가 구르기 시작할 때, 순간 올라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매정하다 해도 어쩔 수 없지. 저 기차를 타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는데. 아무 잘못 없는 내가 왜 피해를 봐야 하는지. 열차표를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연착되기로 유명한 인도의 기차도 출발역에서는 야속하게 정시에 출발했다.     

    괜히 대학생들과 다니기로 했나? 내 또래 직장인들과 어울려 여행할걸……. 어린 친구들과 다니면 좀 더 편할 줄 알았는데, 인도에서의 첫 여행은 처음부터 일이 꼬이고 남은 일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인도로 떠나게 된 계기는 엉뚱하게도 어학연수였다. 못하는 것, 부족한 것을 보완해서 더 완벽해지고 싶은 강박감이 어릴 때부터 심한 편이었는데, 영어 울렁증은 늘 삶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다. ‘어학연수 성공하기’라는 카페를 통해서 어학연수 설명회에 우연히 갔다가 필리핀만큼 물가는 저렴하면서 영국식 고급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어학원이 인도에 있다는 말에 끌렸다. 인도 상류층 사모님들이 선생님으로 1:1 수업을 해 주고, 기숙사에서 숙식 제공은 물론 청소와 겉옷 빨래도 해줘서 평일에는 공부에 매진할 수 있으며, 주말에는 어학원 친구들과 최신식 쇼핑몰에 쇼핑하러 가거나 유명 유적지로 여행을 다닐 수 있는 환경이라 했다. 어학원은 뉴델리에서 멀지 않은 구르가온이라는 신도시에 있었는데, 다국적 기업들의 사무실이 즐비한 산업과 경제의 중심지였다.

    사람들은 이런 독특한 매력에 이끌려서 그 어학원에 짧게는 2개월 길게는 4~5개월간 체류했고 연령대도 다양했다.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온 30~40대도 꽤 있었고, 20대 대학생들은 미국․영국․캐나다․호주 등으로 본격적인 연수를 떠나기 전에 워밍업 차원에서 거쳐 가는 곳이었다.   

   그렇게 인도는 미국이나 유럽보다 훨씬 저렴한 물가에 쾌적한 영어 공부 환경을 제공받을 수 있고, 여행지라는 장점과 더불어 온전히 내 삶에 대해 고민하고 집중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왔다. 또 베일에 싸인 미지의 나라 같은 느낌도 좋았고, 한국과도 멀어서 좋았다. 함께 기숙사를 썼던 대학생들도 인도에 대한 호기심과 저렴함에 끌려 인도를 택했다고 했다. 개중에는 해외여행 자체가 처음인 학생도 있었다.      

    멀어져가는 기차를 그저 바라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뉴델리역 플랫폼에 주저앉은 채로 ‘재현이, 영미! 이것들 가만 두나 봐라. 그까짓 햄버거가 뭐라고! 하루 한 번밖에 없는 기차를 놓치게 만들다니.’라며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어느덧 심장이 격하게 쿵쾅거리고, 눈앞이 빙빙 돌았다. 머릿속은 뒤엉킨 실타래 같았다. 계획 만능주의자인 나는 늘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고, 그대로 착착 움직여야 안도하는 사람이다. 반면, 계획이 어그러지면 대혼란에 빠지고 만다. 30년을 그렇게 살았다. 모든 일은 반드시 계획된 순서대로 진행되어야만 했다. 중간에 완료되지 않은 항목을 건너뛰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도 불가능했던 내게 헝클어진 계획은 불안 그 자체였다.  

    겉보기에는 오지랖 넓고 남 돕기 좋아하는 마음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 나라는 사람은 알고 보면 다소 신경질적이고, 때때로 욱하는 성미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마찰을 빚었다. 그런 까닭에 세 번의 직장생활 모두 번번이 3년을 채우지 못했다. 언제나 일 중독자처럼 열심이어서 신임을 얻고 성과도 나름 많았지만, 공정하지 못하거나 불합리한 일에 대해선 앞장서서 문제제기를 했고 확신에 찬 일에 대해선 어떠한 반대에도 의지를 굽히지 않아서 결국에는 상사들과 불화를 겪었다. 

   내가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인도로 간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내게 용감한 것인지 무모한 것인지 모르겠다며 우려 섞인 비난을 보냈다. 한 직장에 진득하게 다니지 못하는 나를 사회에 부적응한 못난이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내가 일상의 어려움과 정면승부하지 않고 도피하는 것으로 폄훼하기도 했다. 물론 새로운 도전에 부러움과 응원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솔직히 현실 도피의 경향이 없지 않았기에 나는 이 여행을 마칠 때는 예전과는 다르게 살아갈 무언가 하나는 제대로 건져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방식이나 형태는 모르겠지만 그 전과는 적어도 다르게 살아 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앞으로는 기필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떠나온 여행이었다. 시작은 그럴싸하지만 끝은 매번 방전된 배터리처럼 초라해지는 내가 싫어서 감행한 여행이었는데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것 같아 괴로웠다.       


# 2. 자의반 타의반으로 어색한 천사의 탈을 쓰다


    기차가 떠난 지 30분이 지났다. 멍했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지만, 타야 할 기차를 놓쳤으니 그다음 계획은 모조리 물거품이 되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한 감정이 앞섰다. 나머지 6명은 모두 대학생, 나는 단지 그들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왕언니 대접을 받았는데, ‘옹졸하게 화를 내는 건 왕언니 체면에 말이 아니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래도 다음에 똑같은 일이 없게 하려면 짚을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온갖 생각들로 복잡하던 그때 재현이와 영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양손 가득 햄버거와 콜라를 들고서 나타났다. 나와 줄곧 함께 있었던 4명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넷이서 동시에 쳐다보아서 나는 흠칫 놀랐지만, 어떻게 좀 해달라는 그들의 간절한 눈빛을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내 말 한마디에 7명의 앞날이 달렸다. 분위기가 천당과 지옥으로 갈리게 될 그 첫 마디.  

    “음…….” 입술이 쉬 떨어지지 않았다. 목소리가 안 나와 용기를 불어넣어 줄 헛기침을 했다. “음! 음! 괜찮아, 괜찮아! 안전하게 왔으니 됐어. 우리가 서로 얼굴 붉힌다고 떠난 기차가 돌아올 리도 없잖아. 하하하” 웃음은 억지였다. “다음 기차 예약도 하고! 여행 계획도, 다시 짜자!” 마치 무거운 굴레를 벗겨주듯 두 명의 손에 들려 있던 묵직한 햄버거와 콜라 봉투를 받아 다른 아이들에게 건네주고 경쾌한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하지만, 나의 의도와는 달리 결국 두 아이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토닥여주는 5명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낯선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맸던 불안과 초조, 그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된 자유의 눈물. 순간 두 아이의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이 내 안에 가득 들어찼다. 아까 열차가 출발할 때 올라타고 싶었던 이기적인 충동에 대한 부끄러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꾹 참고 열차에 오르지 않은 것에 대한 다행스러움. 이들에게 적어도 나쁜 사람으로 기억되지는 않겠구나, 라는 안도감. 이런 복잡한 감정들이 바닷물처럼 밀려왔다가 빠져나갔다. 

    이윽고 입속으로 밀어 넣은 김빠진 콜라와 눅눅해진 햄버거는 애초부터 맛은 단념했다. 허기라도 달랠 겸 한 입 베어 물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맛있었다. 정말 뜻밖이었다. 햄버거의 ‘눅눅함’은 ‘부드러움’과 ‘촉촉함’으로 다가왔고, 탄산이 없는 콜라는 ‘싱거움’이 아니라 ‘까칠하지 않아 포근하고 달콤함’으로 느껴졌다. 인도 KFC 치킨버거에 뿌려진 소스는 한국에서도 먹었던 매콤달콤 친숙한 맛이라, 낯선 타지에서 경험하는 고향의 맛처럼 편안했다. 그렇게 첫 여행부터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어 준 끼니를 기차역 플랫폼에 철퍼덕 앉아서 뚝딱 먹어 치웠다.      



# 3. 뜻밖의 즐거움을 만나다


    다음 날 같은 시각에 출발하는 바라나시행(行) 기차표를 다시 예매하고 우리들의 나들이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뉴델리역과 가까운 재래시장 ‘빠하르간지’로 발길을 옮겼다. 숙소를 정하고 둘러본 시장에서는 인도 전통의상과 다양한 상품들에 눈이 즐거웠다. 모든 제품이 너무나 저렴해서 여기저기서 지갑이 열렸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5,000원 정도 했던 히말라야 브랜드 핸드크림이 단돈 500원, 인도식 튀김만두 ‘사모사’와 밀크티 ‘짜이’ 같은 주전부리와 음료는 우리 돈 100원이 채 되지 않았다.

   인도여행을 갓 시작한 우리들에게 100원, 500원의 새로운 가치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찮은 몇백 원 따위가 이렇게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다니. 어쩌면 내가 그토록 바라고 좇던, 좌절하고 버둥대던 그 길에서 행복을 찾지 못했던 이유가 너무 거창하고 멋들어진 것만을 좇았기 때문이었을까? 행복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낯선 풍경이자 가장 쇼킹한 것은 상인들의 계산 방식이었다. 여행 책자에서 소개하는 쇼핑 회화를 따라서 ‘순달 바이아 깜까루(잘생긴 착한 아저씨 깎아주세요)’라고 말하면 첫 번째 손님은 정말 깎아 주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람이 똑같이 말했을 때는 오히려 본래 가격보다 비싸게 받았다. 왜 그러는지 따져 물었더니 앞 사람에게서 손해 본 것을 뒷사람에게서 만회해야 자기 입장에서는 평균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란다. 기가 막혔다. 현명한 상인이라고 해야 할지, 공평하지 않다고 화를 내야 할지 어이없는 웃음만 나왔다. 어쩌면 행복도 이런 게 아닐까! 예상치 못하게 깎였던 어제의 행복이 예상치 못하게 오늘 추가되고 있었다. 상인의 매출처럼 총량은 변하지 않게 말이다.   

    빠하르간지 여행은 사전 계획에 없었던 즉흥적인 것이었지만, 아주 즐거웠다. 알록달록 화려한 인도 전통의상이 진열된 가게, 색깔도 모양도 다양한 전등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가게, 손등부터 팔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운 곡선의 헤나 문신을 그려주는 노점을 지나는 길엔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어쩌면 기차를 놓쳤기에 만끽할 수 있었던 낯선 즐거움이었다. 계획한 순서를 건너뛰는 정도가 아니라 여러 가지 수정에 보태어 무계획이 추가된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의외로 마음이 너무나 편안했다. 스스로가 어색할 정도로. 나는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 것 같았다.      

     


# 4. 생(生)과 사(死)의 현장에서 현재(現在)를 묻다. 


        우여곡절 끝에, 둘째 날 낮에 출발해서 셋째 날 새벽에 도착한 ‘바라나시’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의 성지이자 인도여행을 하는 외국인들이 필수 코스로 꼽는 곳이었다. 성스러운 젖줄 갠지스 강이 흐르고, 힌두교도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 하는 종교적인 도시였다. 해 질 녘, 경건하면서도 다소 흥겨운 리듬감을 띠는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수많은 사람이 강가로 이어지는 계단에 모여 앉아 간절히 기도하기에 발길을 멈추고 지켜보았다. 매일 밤, 브라만 계급(인도 카스트제도 상위 계급, 승려)들이 진행하는 종교의식 ‘아르띠 뿌자’라는데 힌두교 시바 신에게 불을 피워 기도드리는 것이라 했다. 느릿한 속도로 몽실몽실 연기를 내뿜는 향로나 수많은 촛불이 모여 만들어진 커다란 촛대를 승려가 일어서서 원형으로 흔들기도 하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 모습은 매우 경건했지만, 딱딱하지 않고 멋진 무용 작품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르띠 뿌자’를 감상하는 도중에 나도 모르게 철학적인 분위기에 취했는지, 순간순간 온전히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었다. 

  ‘저 인도 사람들처럼 간절히 기도한다면, 나는 무슨 내용을 담을 것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었지?’ 

  ‘왜? 그렇게 불안하고 불만스러운 것들이 많았을까?’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은 것은 욕심인걸까?’

  ‘내 직업이 나한테 맞기는 한가? 아니, 내가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일까?’ 

  ‘내가 행복할 때는 언제였지?’ 

  간절한 기도에 접어들기 전까지, 수많은 물음들이 먼저 내 속을 가득 채웠다.      



# 5. 그럴 수도 있다


        새벽녘 갠지스 강에서 맞이한 해돋이의 밝음과 온기, 한낮 숙소 테라스에 앉아 책을 읽으며 느끼는 한가로움, 어두운 밤 뿌자의식의 경건함과 화장터에서 느껴지는 숙연함. 한밤 강가 보트 위에서 강물에 띄워 보내는 촛불과 함께 떠나보낸 온갖 번잡한 속마음. 생(生)과 사(死)의 현장에서 그렇게 나는 과거의 고통, 증오, 후회를 떠나보내고, 미래의 불안과 두려움을 물리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들에 휩싸였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각박하게 살고 있나?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에게는 언제나 현재는 없고 과거와 미래만이 나를 지배하고 있구나.’ 늘 지난 일들에 대한 뒤늦은 후회로 괴로워했고,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으로 노심초사했다. 항상 현재를 즐길 여유가 없었고 내일을 위해 이를 악물고 뛰었었다. 

    하지만, 바라나시 화장터에는 내일이 존재하지 않는 시신과 잿더미로 변한 뼛가루들이 즐비했다.      

    내일이 없다내일이 없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좀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그렇게 달려왔건만, 만약 내일이 없다면 그동안 노력은 모두 무슨 소용이람? 만약 내일이 없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무엇이 하고 싶어질까?’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해돋이 기미조차 없는 어슴푸레한 새벽. 강가에는 우리 일행보다 먼저 나온 인도 노인이 있었다. 강물에 손을 넣고 있는 모습이 온몸을 담그기 전에 수온을 확인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강물과 소곤소곤 대화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한낮의 분주함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평온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강가에 옹기종기 느슨하게 매어져 있는 배를 보며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강력한 구속은 아니지만 끈으로 연결되어 안전함과 소속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 배들은 자유를 갈구하되 어딘가 소속되고 싶은 이중적인 내 마음과 닮아 있었다.  

    날씨가 흐려서 그랬는지 바라나시의 해돋이는 강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온화한 빛 덕분에 오히려 고요하고 평화로운 아침을 맞았다. 이곳은 인도니까. 바라나시 여행에서 내가 건져 올린 보물은 바로 ‘그럴 수도 있다’라는 위로였다. 

계획이 어그러졌다고 슬퍼할 필요 없다. 

또 다른 낯선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앞일을 걱정하며 노심초사할 필요도 없다. 

걱정하는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엎질러진 과거의 잘못은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으니까. 

다른 사람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다고 시비를 따질 필요도 없다. 

그 사람과 나는 어차피 다른 생각 다른 경험의 결정체. 

그저 ‘그럴 수도 있다’고 나를 달래는 순간, 무척 평온해졌고 늘 시달렸던 두통이 사라졌다.      

    그렇게 나는 바라나시 순례에서 다시 태어났다. 예전보다 좀 더 느긋한 마음으로 변화무쌍한 세상살이에 조바심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으로. 오늘도 여전히 좌충우돌하며, 내 안에 불평불만이 들끓을 때 읊조린다.     


    그럴 수도 있다’           

이전 10화 죽을 각오로 달려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