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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 많은 유목민 May 16. 2021

죽을 각오로 달려도

사람과 사람 사이 03. 죽을 각오로 달려도

좌우를 살피지 않고 맹렬히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와 죽을 각오로 내달렸던 그 날의 내 모습이 닮았다.



  어버이날, 가족의 달. 5월이 되니 더 보고 싶고 그리운 사람. 아니, 항상 그리운 사람!    

     

  눈곱과 속눈썹이 바람에 휘날릴 정도로 달렸다. 한겨울 새벽의 매서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급하게 택시를 찾아 큰길로 나섰다. 지나가는 택시든 카카오택시든 뭐든 빨리만 왔으면 했다. 

  “네 엄마가 열이 펄펄 끓어. 내가 붙잡아 줘도 일어서지를 못해. 이런 적이 없었는데 안 되겠어. 119타고 A 병원 응급실로 갈 거야. 너도 빨리 와라. 빨리!”

  다급한 목소리의 아빠 전화를 잠결에 받고 화들짝 놀란 나는 후다닥 일어나 세수도 제대로 못 하고 옷만 갈아입고 뛰쳐나갔다. 택시 안에서도 손으로 연신 눈을 비비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노력했는데 머리가 맑아지는 반면, 심장이 쿵쾅거려서 어지러웠다. 

  택시가 병원 입구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갈 즈음, 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결제 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하기 위해 신용카드를 손에 꼭 쥐고 대기했다. 카드 결제 알림 소리가 들리자마자 택시 문을 벌컥 열고 내달려서 병원 로비로 뛰어 들어가느라 유리문에 꽝하고 부딪히다시피 했지만, 나의 통증을 아랑곳할 겨를이 없었다.      


  이윽고 마주한 엄마는 응급실 침대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는 아빠는 겨울 날씨에 맞게 않게 한여름 슬리퍼를 신고 계셨다. 아빠의 다급했던 상황이 슬리퍼에서 고스란히 느껴져 가슴이 아팠다.

  엄마는 4년 전에 장폐색으로 인해 대장이 괴사 되어 결국 대장 전체를 절제하는 큰 수술을 받았다. 그 후로는 먹을 수 있는 음식 보다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 더 많았고, 그렇게 좋아하시던 회도 그림의 떡이었다. 즐겨 하던 등산도 다닐 수 없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점점 꺼리시게 되었다. 매 끼니 먹던 죽과 미음이 지겨워서 겨우 한 숟가락 남짓 밥알을 삼키면 어김없이 탈이 나서 응급실 신세를 져야만 했었다. 

  “나도 밥 먹고 싶다. 온갖 죽을 먹어도 밥처럼 맛이 있지 않다. 마음대로 먹을 수도, 마음껏 다닐 수도 없는데 살아서 뭐 하냐?”라고 푸념을 늘어놓으시면,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냐고 핀잔을 주었던 내 모습이 후회되어 나도 모르게 뒤돌아 눈물을 훔치기도 했었던 날들이 떠올랐다.        


  다행히 다른 대기 환자가 별로 없어서 응급조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엄마는 3시간 만에 어린아이처럼 쌔근쌔근 평온한 숨을 내쉬며 사르르 잠들었다. 한숨 돌린 나는 작은언니에게 바통터치를 하고 집에 들렀다가 회사로 향했지만, 온종일 엄마가 걱정되어서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퇴근길에 곧장 병원에 들러, 우울한 표정의 엄마와 마주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금식 조치 상태여서, 내가 엄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말동무를 하는 정도밖에 없었다. 다른 환자들을 위해서 병실 조명을 꺼야 할 시간 즈음이 되어서 나는 집으로 향했다. 

  “엄마, 내일 다시 만나요.”라며 손가락 하트를 서로 나누며 헤어졌다.


  토요일 새벽 4시, 곤히 잠들었다가 휴대폰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깼다. 친정 오빠? 어젯밤 엄마가 잠들었던 일반병실이 아니라 중환자실 간호사에게서 전화가 왔다며 빨리 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밤사이에 심정지가 와서 엄마를 급하게 중환자실로 옮겼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며. 병원 입구에 차가 들어서자마자 나와 아빠는 열심히 달렸다. 주차 하러 간 오빠를 뒤로하고 우리 둘은 숨이 차도록 뛰고 또 뛰었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엄마는 이미 혼수상태였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에는 말이 없었다. 링거 거치대에 걸린 약품은 얼핏 보기에 10종류도 넘어 보였고, 혈압과 심박수 등을 알려주는 바이털 사인 모니터만이 요란스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분명히 내일 다시 만나자 했었던 우리 엄마가 맞는가? 제발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밖에 없었다. 의사는 재빠르게 상황을 설명하더니 여러 종류의 동의서를 내밀면서 사인을 하라고 했다. 지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의사밖에 없으니 반사적으로 사인을 해나갔다. 

  “뇌졸중 증상이 동반되어서 깨어나더라도 한쪽 몸이 마비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오늘이나 내일이 고비일 것 같아요.”라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분주하게 사인하던 손가락에 힘이 빠져서 볼펜을 놓쳤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더는 없다는 것이 너무나 화나고 슬펐다. 아무리 죽을 각오로 뛰었어도 엄마와 다시 눈빛을 나누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 안에 닿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나 원통했다. 중환자실에는 보호자가 계속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잠시 짐을 챙길 겸 집에 들렀다가 작은언니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나의 달리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토요일 오전 11시. 주황색 신호를 간신히 비껴가며 맹렬히 질주하는 차 안에 내가 앉아있었다. 새벽과 마찬가지로 차에서 뛰어내린 후에 엘리베이터 앞으로 쏜살같이 갔다. 하필이면 5대나 되는 엘리베이터가 모두 높은 층으로 올라가 있었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어서 3층까지 수십 개의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새벽에 요란하게 울어대던 바이털 사인 모니터는 이미 꺼져있었다. 엄마의 심장이 이제는 뛰지 않는다는 것을 감지한 순간 내 심장도 얼어버렸다. 오작동 되는 기계처럼 머리는 정지 상태에 눈물은 고장 난 수도꼭지 마냥 콸콸콸 폭포수가 되어 흘러내렸다.     


  45년 동안 살아오면서 이렇게 절실하게 전력 질주를 했던 날들이 있었던가? 학창 시절 반대표로 계주선수가 됐을 때도, 운동회 때 1등 도장을 손목에 받아 학용품 선물을 받고 싶었던 초등학생 시절에도, 연합고사 점수와 함께 고등학교 진학에 반영되는 중학교 3학년 체력장 때에도 이렇게 간절하게 달려본 적은 없었다. 

  학창 시절 달리기는 경쟁에서의 우승이자 시간을 단축하여 기록을 세우기 위한 고군분투였지만, 엄마를 만나러 가기 위한 질주는 엄마와 나 사이에 남아있는 시간이 소멸하지 않기를 바라는 애끊는 슬픔의 사투였다.     


  오늘도 꿈속에서 멀어져가는 엄마의 손을 붙잡고 싶어서 열심히 달려본다. 오른손은 앞으로 뻗어지지만, 웬일인지 두 다리는 제자리이다. 발을 세차게 구르면 구를수록 두 다리는 더 굳어져 나무처럼 그 자리에 뿌리내리며 박혀버리는 느낌이다. 

  어느새 엄마는 저 멀리 사라지고 없다. 나는 그만 주저앉아 하염없이 펑펑 울어버린다.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져 잠에서 깬다. 엄마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도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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