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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 많은 유목민 May 16. 2021

삼키기 어려운 것들

사람과 사람 사이 02. 삼키기 어려운 것들


탱글탱글한 과일을 오물오물 신나게 씹어서 꿀꺽 삼켰다. 입안 가득 기분 좋은 단맛이 남아있다. 문득 아버님 생각이 난다


 

   매일 밤, 뼈만 앙상하게 남아 축 늘어진 시아버지의 몸을 세 식구가 온몸으로 지탱하며 약을 떠먹이는 힘겨운 노력이 이어졌다. 교통사고와 치매 여파로 급격하게 건강이 악화한 아버님은 스스로 걷는 것은 물론, 어느새 앉기 조차 어렵게 되었다. 자연히 숟가락을 들 힘마저 없어져 시어머니, 남편과 내가 총동원되어 식사와 약을 챙겨드려야 했다.


   남편이 먼저 갓난아기를 안아주는 엄마의 포즈를 취하고 아버님을 안으면, 내가 밥, 반찬, 물이 담긴 그릇들이 옹기종기 놓인 쟁반을 아버님 턱밑에 들이밀면서 말을 걸었다.

   “아버님, 아~ 하세요. 조금만 더 크게 입 벌려 보세요.”

   아주 짧은 시간 조금 벌어진 아버님 입속으로 신속하게 어머님이 음식이나 물 한 숟가락을 떠 넣어드렸다. 아주 느리게 씹는 듯 물고 있는 듯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때로는 잠을 청하듯 씹지 않고 가만히 있는 아버님 팔을 토닥이며 남편이 속삭였다.  

   “아버지, 꼭꼭 씹으세요. 잘 씹으셨죠? 꿀~꺽 삼키세요.”

   미세하게 아버님 울대뼈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 음식이 목구멍을 거쳐 식도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그런데 웬걸? 두 숟가락째 음식을 드리려는데 입을 벌리지 않아서, 잠깐 승강이를 하다가 입을 살짝 벌려 보면 음식이 입 안에 그대로 있었다. 아버님은 우리를 속이는 재미에 빠지신 듯 빙긋이 히죽거렸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들을 속이고 혼자 신나서 웃을 때 같이 얄밉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83세 개구쟁이.        

   “아버지, 이번에는 안 속아요. 장난쳐도 안 넘어가요.”

   남편은 아버님께 조용하고 은근한 으름장을 놓았다.   

   “아버지, 한꺼번에 삼키기 어려우면 조금씩 삼켜 보세요. 예전에는 잘하셨는데. 기억나세요? 꿀꺽꿀꺽 삼키는 거. 저처럼 따라 해 보세요. 꿀~꺽!”

   어느새 남편과 나와 어머님, 셋은 빈 입속에 침을 모아서 꿀꺽 삼키는 시범을 보였다. 일부러 침 삼키는 소리도 과장되게 냈다.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우리들의 모습을 따라 하며 아버님이 입 안 음식물을 힘껏 삼켰다. 천천히 두어 번 울대뼈가 꿈틀꿈틀 움직인다. 

   과연 이번에는 제대로 삼켰을까?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입 안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넘어갔다. 야호! 우리 셋은 환호했다. 어린아이가 오물오물 씹어 음식을 잘 먹을 때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어른들 같은 눈빛을 보내며 어머님이 덧붙였다.   

   “아이고, 우리 여보 잘 드시네.” 

   “아버님, 잘~ 하셨어요.”  

   남편과 나도 이구동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 아버님의 눈동자가 기뻐하는 세 식구를 번갈아 둘러보는데, 때로는 고맙다, 때로는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때로는 살짝 촉촉해진 눈망울로 쓸쓸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없어진다는 것을 속상해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또 어떤 날은 맞은편 벽에 걸어둔 액자를 뚫어져라 응시하기도 했다. 20여 년 전 백두산 천지에 올라 찍은 사진 속 아버님은 훤칠한 180cm 키에 등산으로 다져진 근육이 다부진 건강한 모습이었다. 우리도 아버님의 그때 그 모습이 그리운데 아버님 자신은 오죽할까?        

   우리 셋은 얼마든지 더 할 수 있었는데, 이런 장면은 겨우 3개월 만에 끝이 났다. 음식을 포도 씨 한 알 만하게 아주 작게 다져도 보고, 믹서에 갈아서 미음 상태로 만들어도 보고, 약도 알약 빻는 도구를 이용해서 밀가루같이 곱게 갈아 보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어떤 형태의 음식도 아버님이 전혀 삼키지를 못하셨다. 


   더 이상 가족의 힘으로 아버님께 영양을 공급해 드릴 방법이 없었다.  ‘그래, 가족은 못 해도 병원 의사들은 이 문제를 해결해 주겠지’라는 한 줄기 희망을 안고 찾아갔던 병원에서 얻은 결론은 연하장애(嚥下障碍). 연하(嚥下 : 삼키기) 자체가 되지 않으면 음식이든 약이든 입으로 섭취가 불가능했다. 결국 아버님은 종합병원에서 퇴원해서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시고, 요양병원으로 옮겨 인공호스에 의지해 생명을 이어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퇴근길이나 주말에 병원에 들러 아버님 얼굴을 닦아 드리고, 좋아하시는 음악을 들려드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5개월이 흘러, 초여름에 접어든 6월 중순 새벽. 중환자실 간호사 호출을 받고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탔다. 평소 우리 집에서 병원까지 15분 이상 걸리던 거리를 5분 만에 갔다. 혈압, 산소포화도, 맥박 모두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제발 다른 형제들이 도착할 때까지 버텨주시길 간절히 기도했다. 서울까지 용인, 안산, 충청 오송에서 올라온 자식들 한 명 한 명과 눈 맞추고 마지막 인사를 나눌 시간이 다행히 허락되었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 듯 아버님 울대뼈의 미동이 감지되긴 했지만, 산소 호흡기에 가로막히고, 입술을 움직일 기력조차 되지 않아 결국 육성을 들을 수는 없었다. 물론 말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으로 대화하고 있었지만……. 

   어느덧 서서히 잠들 듯이 호흡이 잦아들더니 아버님의 온몸이 아이보리색으로 변했다. 마치 대리석 조각상이 된 듯했다. 의사의 사망 선고가 있었지만, 아버님께서 먼 길을 떠나셨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아버님의 손에는 내 손보다 따뜻한 온기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한참 동안 그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5개월가량 생활했던 요양병원을 뒤로하고, 빈소가 마련된 종합병원 장례식장으로 모시고, 빈소 국화꽃 장식에 파묻힌 액자 속 아버님 얼굴을 마주하는데 너무나 어색했다. 그렇게 한참을 물끄러미 아버님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데, 큰 시누이가 던진 한마디. 

   “아버지 사진 위에 검은 리본이 있었어. 이제야 보이네.”

   “그러게요. 형님. 처음에는 아버님 얼굴만 보였는데, 형님이 얘기하시니까 이제야 검정 리본이 보여요.” 

   정말 그랬다. 고인의 사진 액자 위에 ‘ㅅ’자 모양으로 두른 검정 리본의 존재를 깨달은 것이 아버님의 죽음을 실감하고 인정하게 된 첫 순간이었다. 심장은 찌릿찌릿 가슴은 저렸다. 사진 속 아버님은 지금이라도 뭐라고 말씀하실 것만 같은데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빙긋이 웃고만 있을 뿐. 

   나도 마음껏 엉엉 울고 싶었지만,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어머님을 챙겨야 했고, 계속 이어지는 조문객들을 맞아야 했다. 접견실 음식이 부족할세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근조화환 도착을 확인하며 첫째 날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빈소에서 맞이한 둘째 날에는 입관식과 성복제가 이어졌다. 입관식에서 다시 마주한 뼈만 남은 아버님의 몸을 보며 비통함이 몰려왔다. 고인의 두 다리를 한 손으로 가뿐히 들었다 내려놓는 장례지도사의 팔에 힘이 별로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한지 꾸러미를 잠시 들었다 놓는 것처럼 가뿐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한지를 양손으로 갈기갈기 찢는 것처럼 내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성복제 때 정갈하게 음식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는데, 고인께서 편안하게 식사하도록 가족들은 뒤돌아 있으라는 장례지도사의 말에 참았던 눈물이 양쪽 눈에 가득 고였다. 고인께 잘게 썰지 않은 온전한 모습의 음식으로 차려드리는 식사는 거의 1년만 이었다. 비록 음식 자체를 드시는 것이 아니지만, 정말 오랜만의 식사. 부디 맛있게 드시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굵은 눈물 줄기가 주룩주룩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고개를 더욱 푹 떨구자 눈물이 방울방울 엄지발가락 앞에 떨어졌다. 금세 자그마한 웅덩이가 만들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울었어도 눈물이 여전했다. 아버님은 생전에 음식을 삼키기 어려워하셨지만, 우리들은 눈물을 삼키기가 너무나 어려운 순간이었다. 

   남편도 장례 기간에 가장 슬펐던 때가 성복제였다고 했다. 아버님 생전에 조금이라도 더 드시게 하려고 매일 밤 노력했던 때와 오버랩되면서, 저 깊숙한 창자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슬픔이었다고 했다.     

  

   셋째 날 이른 새벽에 발인을 마치고, 추모공원에 도착했다. 아버님의 관이 미끄러져 들어가고 화장장 철문이 내려오며 닫히는 순간은 채 10초도 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한데, 마치 초고속카메라에 찍힌 매우 느린 화면같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 이제 영원히 이별하게 된다는 생각에 그 장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찰나의 모습들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기억하고 있는가 보다.  

   그때 온 가족이 모두 오열하느라 아버님과 제대로 작별 인사를 못 하고 있었는데,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우렁찬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눈물과 울음이 뒤범벅되었지만, 고인도 들을 수 있을 만한 또렷하고 우렁찬 남편의 목소리.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그제야 여기저기에서 마지막 인사가 터져 나왔다.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아버님, 안녕히 가세요!” 


   마치 아주 깊은 산속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처럼 내 귓속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그 목소리. 그 짧은 찰나에 전할 수 있는 가장 간단명료하고 진심이 담긴 메시지.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평소에는 ‘아버지 사랑합니다’라는 쑥스러운 말 대신 매일 밤 꼬박꼬박 끼니를 챙기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했던 막내아들. 장례 동안 상주로서 다른 가족들보다 더 크고 무거운 짐을 졌던 남편이 쏟아낸 애통함이 서려 있는 그 마지막 인사에 나의 눈물샘 둑은 또다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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