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태윤 20대 중반 남자 성과관리팀 사원
민규 20대 후반 남자 성과관리팀 주임 독특하지만 착한 녀석
준호 30대 초반 남자 지역사업팀 대리 어울려 다니는 5명 중에서 가장 연장자
김팀장 40대 초반 남자 성과관리팀 준호를 믿을만하다고 생각
지연 30대 초반 여자 지역사업팀 대리
서윤 20대 중반 여자 지역사업팀 사원
수요일 오전 금요일 저녁이 저 멀리 아른 아른 거리는 시간. 김팀장이 준호를 메신저로 불렀다.
-준호 씨 잠시 내 자리로 와주세요.-
준호는 이 회사에 입사한지 4년차 이제 대리가 된 청년이다. 그는 180 중반의 큰 키에 운동도 곧잘하고 늘 자신감이 넘쳐보이는 주도적인 타입의 인물이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준호는 요즘 애들하고 다르게 싹싹하고 괜찮은 거 같아."
라는 술자리의 평에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역시 야심이나 야망이 있어서 그렇게 사는구나. 생각했을테지만 준호는 거절이라는 걸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팀장님의 등산, 부장님의 주말 낚시에도 동행을 했었다.
그런 준호의 이미지 때문에 회사의 모두들 준호에게는 무리한 제안이나 부탁을 하곤 했었다. 준호는 그런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또 잘 수행하는 탓에 다시 부탁이 들어오는 그런 상황이었다. 호구는 더 호구가 되는 법이다.
"준호 씨 우리가 다다음주에 해야 할 게 있는데 매년 각 지점별로 억지로 하는 거거든요. 일단 이것부터 확인해 보세요."
김팀장이 준호에게 방금 인쇄된 것 같은 공문을 건넸다. 프린터에서 갓 나온 온기를 느끼며 준호는 공문을 읽었다.
A.I 업무과정 혁신 창조 공모전
접수기간, 자격, 방법, 유의사항 등이 적힌 포스터를 준호는 빠르게 살펴보고 있었다.
"작년에는 메타버스도 문구에 넣더만 올해는 뺐네요. 부장님 말로는 새로 오신 원장님이 여기에 관심이 많으시대요. 본부에서 이 업무를 해보셨다고 하면서요. 작년에는 대충 하고 넘겼는데 올해는 그러진 못할 거 같고. 일단 우리 지점 내 공모전을 개최하게 한 다음 뭐라도 결과를 내야 할 거 같아요. 젊은 사람들 특유의 톡톡 튀는 걸 원하시는 다던데. 그 준호 씨 20대이신 분 들하고도 친하게 지내잖아요?"
김팀장이 웃으며 준호를 바라보았다. 믿는다는 표정이지만 그걸 보고 있는 준호는 불편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내는 거긴 한데. 아예 참가가 없으면 윗분들 보기에 좀 그럴 거 같아요. 일단 시간은 충분히 있으니까 부담은 갖지 마요. 안되면 우리끼리 뭐라도 해보죠."
김팀장이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담갖지 말라는 말만큼 부담이 되는 말이 없다. 일단은 알아서 해봐라는 말이다.
뭐라도 해야지. 는 나쁜 말은 아니다. 다만 준호는 A.I라고는 쳇지피티에게 맛집 추천을 받거나 슬램덩크 명대사 찾아줘. 정도로 밖에 써본 적이 없었다. 다만 그래도 어쩌겠나. 서무의 운명 또 예스맨의 운명이라는 건 그런 법이다.
"준호 씨 마우스가 안 돼요."
"준호 씨 프린터가 안 돼요."
"준호 씨 자동차 시동이 안 걸려요."
대처 방법이라고는 전원을 끄고 키는 것 밖에는 모르는 준호였다. 컴퓨터를 잘 아는 민규의 도움을 받기도 하며 어찌어찌 사무실 컴퓨터도 준호씨도 잘 굴러가고 있었다.
"그래서 다들 좋은 아이디어 없어?"
시끄럽던 술자리가 조용해졌다. 준호는 지연, 태윤, 서윤, 민규 순으로 쳐다보았다.
"준호쌤 대충 해. 팀장님이고 부장님이고 우리한테 크게 기대를 하겠어?"
지연이 말했다.
"저도 아이디어가 있으면 뭐라도 낼 텐데. A.I는 몰라서요."
태윤이 말했다.
서윤은 아무 말 없이 기분 좋게 취해서 태윤에게 기대려 하고 있는 상황에 준호는 마지막으로 민규에게 기대를 걸었다.
"우리 그룹 TMI의 화신 민규는 A.I 관련해서 아는 게 많지 않을까?"
준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민규에게로 모였다.
"아. 음. 형 저도. 뭐 잘 몰라요. 그냥 쳇지피티같은거 밖에 모르는데. 그리고 형때문에 나 아직도 독서동아리 운영한다고 억지로 독서감상문 적고 있는데."
"공모전인데. 아무도 참가 안 하는 건 이상하잖아."
준호의 말대로 아무도 낸 게 없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준호는 사내 메신저 공지 게시판에 공문 붙이기 등을 했지만 - 놀라울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아니 그러면 본인이 내도 되잖아. 왜 우리한테 뭐라 그래. 그리고 그거 냈다가 괜히 일 떠맡는 거 아니야? 자발적으로 내는 거라면서 왜 이렇게 비자발적인 거야. 우리 팀장님이지만 좀 무책임한게 있어."
지연이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아이디어가 없으면 도와주시긴 할 거 같은데. 20대의 톡톡 튀는 감성이라니. 나도 30대인데 뭘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모르겠어."
술자리는 그렇게 준호의 신세한탄 및 나이타령으로 끝을 맺었다. 그렇게 디데이가 찾아왔다. 준호는 결심했다. 아이디어가 없으니 그냥 아무거나라도 적어서 내자.
"준호 씨 그래서 제출된 아이디어가 하나뿐이라는 거예요?"
팀장님이 말했다. 준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준호 씨가 낸 거고?"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아이디어라는 게 A.I 량은 하등 상관없는 우리 회사 2층에 있는 다목적실을 사내 커피숍처럼 만들자는 거고요?"
준호는 고개를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김팀장이 준호의 계획안을 보았다.
"뭐 아예 뭐가 없는 것보다는 좋네요. 그건 그렇고 우리 회사 사람들 옛날이나 지금이나 참 참여도가 낮아요. 제가 신입일 때도 이런 공모전을 종종 했는데. 결국 담당자만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그러는 거죠. "
'라고 참여 안 한 김팀장이 말했다.' 준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수고하셨어요. 뭐 꼭 해야 할 일은 아니고 참여자가 없다고 하니 어쩔 수 없죠. 제가 부장님께 말씀드리고 그다음 생각해 봅시다."
준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내고 끝이겠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자리에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