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만나

주제:내가생각하는사랑이야기

by 드래곤실버

* 해당글은 허구입니다.

낮은 덥지만 밤은 시원하다. 회사 앞에서 나는 그녀를 기다린다. 여자를 기다리는 건 몇 번을 해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건 내 인생에 여자를 기다려본 건 손에 꼽을 정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를 기다리며 나는 적절한 대화 주제를 머릿속으로 생각한다.


"조금 늦었지? 일이 약간 끌려가자고."


"아니. 나도 좀 전에 왔어."


몇 분 지나자 그녀가 손을 흔들며 걸어왔다. 우리는 퇴근하고 나면 만나서 같이 산책을 간다. 그러면서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 얘기 주제는 보통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건 완전 어이없었어."


"걔는 왜 또 개념 없게 군데."


그녀와의 대화는 늘 즐겁다. 우리들의 회사일 얘기는 늘 비슷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얘기하면 재밌다.


"오늘 머리 묶었네?"


"아 맞어 너 머리 묶은 거 좋아하지?"


그녀가 내 앞으로 와서 한 바퀴 돌며 말했다. 너무 많은 정보가 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던가?"


"아니 그냥 보면 알겠던데. 여자라면 다 알걸? 티 안난다고 생각했어? 우리 회사 사람들도 다 아는데."


그녀가 머리를 돌려 헤어스타일이 잘 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티가 많이 났었나? 나는 그렇게 티를 내는 사람이 아닌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 아 이 사람은 머리 묶으니까 확실히 반응이 다르다. 그렇게 느꼈는데."


그녀의 말에 나는 과거를 회상한다. 계절이 바뀐다. 그때는 약간 추운 봄이었다. ---


"우리 처음 봤을 때 너는 머리 풀고 있었어."


"그랬나? 그런것까지 기억하고 있어?"


나는 당시 상황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녀를 처음 본 날 나는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된 때였었다. 점심 먹고 난 늦은 오후였다.


"나한테 그랬잖아 '오늘은 다른 분이 오셨네요.' 라고."


"아! 맞아 맞아. 확실히 기억나. 맨날 오던 배불뚝이 머리 빠진 아저씨가 아니라 멀쩡한 사람이 왔다고 다들 그랬었다."


"그 사람이 지금 내 옆자리 내 사수야."


"아. 그럼 조심히 말해야겠네."


그녀가 익살스럽게 말했다. '그분 좋은 선배야.'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머리는 남의 일이 아닌 지라 나도 걱정되는 부분인데.


"평소에 오시던 분이 아니라. 젊고 키큰 청년이 왔다고 다들 얘기했었지. 새로운 사람만 오면 시끄러워지는 동네야."


"내가 그렇게 보였구나."


약간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젊고 키큰 청년 - 카톡 프로필을 이걸로 바꿀까?


"이 동네야 변하는게 별로 없으니까 새로운 사람이 오면 다들 관심을 가지게 돼지. 특히 젊은 사람이면 더 그렇고."


"그럼 그때부터 나한테 관심이 있었던 거야?"


그녀는 어떤 대답을 할까? 괜히 말했다는 후회와 알고 싶다는 궁금증이 겹쳤다.


"솔직히 말하면 없진 않았지."


이런 종류의 말을 할 때면 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눈이 커서 이쁘기도 하지만 부담이 된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좋은걸까. 좋기도 하고. 아니 그냥 좋기만 하다.


"나는 솔직히 대답했는데 그쪽은 어때? 그때 나한테 반한거야? 어때? 어때?"


그녀가 내 앞을 가로 막으며 말했다. 나는 말로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웃는 얼굴이 이뻤으니까. 그렇게 만난 이후로 우린 업무 때문에 종종 마주쳤다. 그리고 그녀와 내가 처음으로 사적인 대화를 하게 된 건 어느 비오는 날이었다.


"근데 재밌는 사실 알려줄까? 그동안 말 안 했던 건데."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뭔데?"


"나한테 같이 우산 쓰고 가자고 한날 나 사실 우산 있었다."


"뭐?"


나는 놀라서 크게 말했다. 아마 이번년도 내가 낸 목소리 중에서 가장 컸던 것 같다.


"깜짝이야. 놀랬잖아. 그때 우산꽂이에 놓은 우산을 챙기려고 하려던 찰나 네가 말을 걸었던 거야."


나는 얼굴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로 '혹시 우산 안가지고 오셨나요? 같이 쓰고 가실래요' 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정말 큰 용기를 냈었다. 인사를 하는 것만 해도 어려운 일었는데.


"그.... 그랬어? 그럼 그때 우산 있다고 말을 왜 안했어?"


"그때 네 눈빛이 큰 용기를 낸 거 같아서 거절을 못했어. 들릴 듯 말듯 목소리를 내리깔고선 '우산.... 우산... 안가지고 오셨죠?' 이러고 있는데 가지고 왔어요. 라고 말을 못하겠더라고."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오늘 내 세상이 무너졌어."


기분 좋은 배신감..... 이라는 표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는 그런 감정을 느꼈다.


"괜찮아. 그깟 세상은 나랑 같이 새로 지으면 되니까. 그리고 맞아. 그때 내가 머리를 묶었었지. 오늘처럼."


"맞아. 그날 오늘하고 헤어스타일이 완전 똑같았어."


그날 나는 긴장했었다. 건물 밖으로 나가려는데 그녀가 하늘을 보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을 걸었고. 우산을 쓰고 데려다 주기로 했다. 걸어가면서 무슨 얘기를 했더라. 아마 날씨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러고는 나는 회사 얘기를 했었다. 그러고 그녀는


"오늘은 카페에서 커피나 마실까?"


그녀가 내게 그날 그때 그랬었던 것처럼 말했다.


"좋지. 앉아서 시간 좀 보내다가 가자."


"주말에 어디로 놀러갈거야?"


"어디든 좋지."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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