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보고서의 요약 보고서의 요약 보고서의...
*실제 상황에서 약간의 각색을 거쳤습니다.
몇 년 전의 일이다. PPT로 몇십 장에 달하는 보고서를 작성해야 할 일이 있었다. 워낙 방대한 양의 보고서이기에 작성하는 데 어마어마한 시간이 든 것은 당연했다. 작성 자체로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나였지만, 진짜 걱정은 따로 있었다. 이.. 몇십 장 짜리 보고서를 윗분들한테 대체 어떻게 보고해야 되지? 이미 작성할 때부터 보고 생각만 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꽤 중요한 내용이 들어가 있는 보고서이지만, 긴 걸 싫어하는 윗분들 특성상 그대로 가져가면 바로 '요약정리해 와' 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몇십 장 짜리 PPT를 보다 보기 쉽게 정리한 열몇 장 짜리 PPT 요약 보고서를ㅋㅋㅋ 별도로 만들었다. 원 보고서가 세세한 내용까지 다 적혀 있는 버전이라면, 요약 보고서는 큰 줄기만 따와서 한눈에 보기 아주 편하게 만든 버전이었다. 당연히 기존 몇십 페이지 보고서에 1n 장의 보고서를 추가 작성해야 하는 것이니 그만큼 내 업무시간을 더 갈아 넣어야 했다. 하지만 어쨌든 뿌듯했다. 이 정도면 부서장님도 읽어 주시겠지! 그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대에 찬 눈빛으로 보고하러 간 나. 전체 보고서를 내밀며 '원래 전체 보고서는 이것입니다만, 너무 길어서 보시는 분들이 힘들 듯하여 요약 보고서를 작성해 봤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부서장님은 아주 흐뭇해하시며 잘했다고 칭찬하셨다. 그리고 요약 보고서를 후루룩 넘겨보시더니, 나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이것도 너무 좋은데, 한글로 한두 페이지짜리 요약된 보고서 좀 작성해 줘'.
그렇다. 부서장님은 요약보고서에 대한 요약보고서(ㅋㅋㅋ)를 요청하셨던 것이다! 나는 당황해서 소심하게 반항해 보았으나(이게 요약보고서인데요...), 당연히 묵살되었다. 결국 나는 수십 장 짜리 보고서를 요약한 1n장짜리 PPT 보고서를 다시 한글문서 1~2페이지로 작성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하면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절로 나오더라.
사실 윗분들이 요약 보고서를 좋아하시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자기 업무만 하면 되는 실무자와는 달리, 부서장 이상 올라간 사람은 검토해야 하는 업무의 범위가 무한대로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모든 업무에 대해 디테일까지 들여다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전체 보고서는 건너뛰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머리로는 그런 사정을 이해하면서도, 막상 실무자 입장에서 보고하러 가면 내가 며칠간 공들여서 작성한 보고서는 말 그대로 '패싱'당하고 그걸 정리한 요약보고서만 들여다보고 있는 부서장님을 볼 때면 '원 보고서 중간 몇 페이지는 그냥 막 썼어도 되었겠는데?'라는 불손한 생각이 들고 말아 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한글문서로 1~2페이지를 요구받는 상황은 굉장히 나이스한 상황이다. 진짜 시험은(?) '원페이지로 만들어 와 달라'는 요청에서 시작된다. 원페이지. 그렇다. 한 장 안에 모든 내용을 쑤셔 넣어야 한다. 윗분들 중에는 정말 강박적으로 원페이지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다. 두 장 이상 넘어가면 보기가 싫다는 것이다. 한 장으로 만드는 것 자체야 어렵진 않다. 목적 적고, 세부내용 적고, 기대효과 적고. 뭐 대충 2:5:3 정도의 비율로 작성하면 되겠지. 진짜 문제는 한 페이지짜리 보고서를 만들어서 보고하러 갔을 때 벌어진다. '아, 여기에다가 최근 5년간 실적 표로 정리해서 추가하고, 이 밑에다 기대효과 한 줄 더 써서 가져와'라는 피드백이 떨어진다. 하지만 여전히 '원페이지'는 유지해야 한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이전에 다른 브런치 글에서도 살짝 쓴 적이 있는데, 이런 상황이 되면 보통 몇 가지 꼼수를 부리기 시작한다. 첫째, 행간 줄이기. 보통 한글문서는 행간이 160%로 맞춰져 있고, 이 상태에서 가장 보기 좋다. 하지만 한 페이지로 줄여야 하는 내 입장에서 보기 좋은 건 필요 없다! 행간을 140% 정도까지 조정해 본다. 이러면 보통 한 줄 정도는 추가하는 데 무리가 없다.
둘째, 표 셀 크기 줄이기. 표를 보기 편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표 안 내용 위아래로 약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보기 예쁜 보고서를 만드는 게 아니다! 그러니 표 안에 커서를 놓고 단축키 F5와 화살표를 눌러 하염없이 크기를 줄인다. 표가 많이 들어간 보고서의 경우 이 작업을 통해 한 행 정도는 추가할 수 있는 공간을 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셋째. 이 모든 것을 해도 답이 안 나온다면, 최후의 수단을 쓰는 수밖에 없다. 단축키 F7을 누른다. 한글문서의 용지 여백 자체를 조정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기관은 용지 여백 규격을 정해놓고 쓰니, 이걸 건드리면 안 된다(원칙적으로는). 하지만 때로는 용지 여백 기준보다 한 페이지에 쑤셔 넣는 게 중요한 상황도 있는 법이다. 이럴 때는 용지 왼쪽 오른쪽 여백을 약간씩 조정해서 공간을 마련해 본다. 도저히 답이 없을 때는 위아래 여백도 약간 줄인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 어찌 되었든 내용을 추가하면서도 한 페이지를 넘지 않는 보고서가 완성된다.
결국 윗분들이 그렇게 좋아하시고 찾으시는 '원페이지' 보고서가 완성된다. 이걸 들고 원 보고서, 요약 보고서와 함께 다시 보고하러 가면, 부서장님이 매우 흐뭇해하시며 내가 고생고생해서 작성한 원 보고서와 요약 보고서는 '원페이지' 보고서의 '붙임' 자료로 만드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쩌겠는가? 윗분들은 바쁘시고 내 업무에 대한 애착은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을. 나라도 내가 만든 보고서를 사랑해 주는 수밖에 방법이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