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좋은 아이디어 낸 사람이 업무 더 하기(?)
몇 년도 더 전의 일이다. 내가 속한 팀에서 준비해야 하는 큰 행사가 하나 있었고, 그날의 회의 주제는 'ㅇㅇㅇ 행사 기획안 도출'이었다. 대강의 큰 주제만 정해진 상태에서 세부 기획안을 짜야하는 상황이었다. 부서장님은 회의가 좀처럼 진척되지 않자,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들었다. "자, 지금부터 돌아가면서 아이디어 무조건 하나씩 내. 아이디어 안 내면 회의 안 끝나는 거야." 할 일이 쌓여있는 직장인 입장에서 회의가 안 끝나는 것만큼 짜증 나는 일이 없다. 결국 모두가 쭈뼛쭈뼛하며 요상하거나 뻔한 아이디어를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당시의 나는 좀 어렸고 의욕이 넘쳤고 약간은 바보였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 내 업무 관련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그걸 뱉어내는 것을 참지 못했다. "제가 협업하고 있는 A업체의 주력사업이 이번 행사와 부합하는 것 같은데, 그쪽 분을 섭외해서 강연 같은 걸 진행해 보면 어떨까요?" 부서장님은 내 아이디어를 듣고 매우 흡족해하셨다.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럼 ㅇㅇ씨(나)가 업체에 연락해서 섭외하고 그 세션 진행해 봐." 그렇게 길었던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원래 그 행사는 내 업무가 아니었고, 다른 사람이 담당하는 업무였다. 그날 부서 회의를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행사를 기획함에 있어 '아이디어'가 필요해서였고, 행사 관련 업무는 담당자가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내 담당업무 관련 아이디어를 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졸지에 해당 세션을 기획수행관리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A업체 연락과 연사 섭외, 발표문 관리, 후속작업 모두 내 차지(?)였다. 아이디어만 냈을 뿐인데, 심지어 그 아이디어가 좋아서 채택되었을 뿐인데, 내 업무가 늘어나다니! 하지만 이것은 그다지 특이한 일이 아니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 아이디어를 냈다가 그 업무를 내가 뒤집어쓰는 경험을 몇 번이고 할 수 있었다...ㅎ
반복되는 경험으로 나는 깨닫고 말았다. 그렇구나, 좋은 아이디어를 내면 그게 바로 일로 전환되는 거였어! 그제야 다른 사람들이 형편없는 아이디어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디어가 채택되면 그 사람이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 이후로는 어찌 되었냐 하면... 나조차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내가 하게 되더라도 큰 문제가 없는 (결과적으로 조금은 뻔할 수밖에 없는) 아이디어만 제시하게 되었다. 씁쓸한 현실이다.
위 사례에서 약간 다른 경우도 문제가 된다. '내 업무와 관련된 아이디어를 내면 내가 그 업무를 (실제 업무분장과 상관없이) 하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나랑은 일절 관계없는 업무 관련된 아이디어를 내면 되는 거 아닌가?' 싶을 수 있다. 나도 이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C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내가 옆팀의 d대리가 담당하고 있는 D업무에 대해 '요렇게 개선해 보는 건 어떨까?'라는 생각을 평소에 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다 사업 개선 아이디어를 내라는 회사의 압박이 올 경우, 내 업무가 아닌 D업무의 개선방안(평소 생각한 아이디어)을 낼 수 있다. 이 경우,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로, 내가 담당하는 업무가 아닌 다른 업무에 대해서 내가 잘 모르기 때문에 나이브한 태도로 내민 개선방안일 수 있다. D업무를 타 공공기관과 같이 협업해서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아이디어를 그렇게 써냈는데, 알고 보니 D업무는 보안업무에 해당해서 타 기관과의 협업이 불가능한 업무였다와 같은. 문제는 윗분들은 그런 현실적 제약은 별로 중요시하지 않고, 아이디어의 참신함만 가지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오, 그 아이디어 좋은데? d대리 들어오라고 해봐'가 실현될 경우, d대리는 왜 그 업무 추진이 불가능한지 그 이유를 보고하느라 진땀을 빼야 한다. 영 좋지 못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그 개선방안이 실현 가능한 것이긴 한데 담당자를 매우매우매우 갈아 넣어야 하는 아이디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D업무의 유관자들에게 만족도 조사를 해서 그 결과를 분석해 내년 사업 개선방안에 반영하자는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윗분들이 만족하며 d대리를 부른다. 가뜩이나 D업무로 인해 매일 야근하고 있던 d대리는 이제 유관자들 대상으로 설문조사까지 진행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지시를 듣고 그 아이디어는 누가 낸 것인지 출처를 파악한다. d대리는 나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된다(진짜다. 칭찬은 저 사람이 받고 일은 내가 늘어나면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위와 같은 이유로, 회의 시간에 아이디어를 내는 것은 늘 러시안룰렛이 돌아가는 것 같다. 채택되는 순간, 그 사람이 고통 당첨이다. 자기 일이 늘어나든지, 남의 일이 늘어나 관계가 곤란해지든지. 물론 정말 신박해서 업무량을 크게 늘리지 않으면서도 성과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엄청난 아이디어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예상하시다시피 보통의 경우 일반적인 회사원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아이디어의 범위는 뻔하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업무 담당자가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 말인즉슨, 웬만한 아이디어는 담당자가 생각해 봤고, 안 할/못할 이유가 있어서 추진하지 않았던 아이디어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아이디어가 채택되는 순간, 다~ 이유가 있어서 안 했었던 그 업무를 억지로 추진해야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쓰고 나서 보니 나도 참 비관적이다. 윗분들이 참 싫어하는, 의욕 없고 진취적이지 않은 사원의 생각회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변명해 보건대, 나도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다. 위에서 이야기한 경험(아이디어를 냈다가 내가 독박 쓰거나 남을 고통스럽게 한 경험)을 하며 이 상처 저 상처받다 보니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 뿐. 오늘도 회의 시간에 개선방안을 내라는 부서장님의 말씀을 듣고 머릿속에 떠오른 몇 가지 생각을 말하는 걸 꾹 참아낸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한 후, 내가 크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수행할 수는 있을 것 같은 뻔하디 뻔한 아이디어를 하나, 조심스럽게 말해 본다. 부서장님의 표정은 썩 좋지 않다.
*실제 상황에서 약간 각색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