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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란 것을 해보기로 함

초고가 나의 최선인 것이 아니었던가


  어떤 장르의 글이든지 간에(소설이든, 에세이든) 일필휘지로 멋지게 써낸다고 자랑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간 제대로 된 '퇴고'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글을 쓰는 당시에는 수없이 백스페이스바를 누르며 썼다 지우고 고치고 난리를 치지만, 그 글을 일단 '발행'하고 나면 고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 나는 내가 쓴 글이 재미있었다. 아무리 객관적 퀄리티는 보장하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내가 재미있어하는 소재로 내 취향대로 써재낀 글이다. 자신의 생각을 적어둔 글이니 스스로가 읽었을 때는 (그 문장이 비문이라 할지라도) 막힘없이 읽혔다. 그러니 수정할 부분을 찾는 것이 어려웠다. 둘째로, '발행' 버튼을 누른 시점에서(소설의 경우 어딘가에 '제출'한 시점에) 나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있어 보이는 표현과 단어들을 끌어와 써서 글을 완성한 것이니, 다른 사람이 수정해 줄 수는 있어도 나 자신은 더 이상 수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도 도대체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쓴 것이었으니까. 


사진: UnsplashArt Lasovsky



  이런 안이한 생각으로 퇴고 없이 써대기만 하기를 몇 년째, 드디어(?) 퇴고라는 것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다가오고 말았다. 듣고 있던 소설 수업에서는 썼던 소설을 고쳐서(정확히는 양을 늘려서) 제출하기로 했고, 브런치에 있는 덕질 관련 글들을 모아서 책으로 내기 위해 발행했던 글들을 다시 읽어보고 수정할 부분은 수정하기로 했다. 마감이 정해져 있는 두 가지 이벤트가 겹치면서 비로소 내가 썼던 글을 반강제로 고쳐쓸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계속 읽기만 했다. 내가 썼던 글을 읽고, 또 읽고... 그래, 이게 최선이었어. 내 지금 실력으로는 더 잘 쓸 수 없었어. 그런 확신만 커져갔다. 도저히 시작이 안 되자, 소설부터 잡고 손 보기 시작했다. 일단 양을 늘려야 하는 상황이니 세부 상황에 대한 디테일들을 추가해서 작성하기보다는 아예 새로운 장면을 한 개 끼워넣기로 마음먹고 중간에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해서 작성해 보았다. 그랬더니 새로 추가한 내용과 기존에 작성한 내용이 충돌해 맞지 않는 부분이 생겼다. 그래서 그 부분을 좀 고쳤다. 그랬더니 또 다른 부분이 어색해 보이고... 의 반복을 하고 있던 와중, 나는 깨닫고 말았다. 오, 나 지금 제법 퇴고라는 것을 하고 있잖아? 


  그렇게 나는 퇴고의 진리를 깨닫고 말았다. '어떻게든 일단 시작하는 것'. 이렇게 간단하고도 어려울 수가! 일단 아무 부분이나 잡고 한번 고치기 시작하자, 그다음부터는 물 흐르듯이 다음으로 고칠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진리는 에세이에도 적용되어, 한글에 쭉 저장만 해두고 수정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원고에도 추가로 아무 내용이나 작성하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퇴고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나는 (물론 마감의 힘이 제일 컸지만) 두 글의 퇴고를 맹렬히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번 소설수업 때 선생님께 퇴고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에 대해 선생님께서는 '정 안 되면 글을 좀 묵혀두는 것이 방법'이라고 하셨다. 바로 직전에 쓴 글은 아무리 퇴고하려고 해도 아이디어가 잘 안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고를 써두고 한 세 달쯤 생활하다가 다시 들여다보면 고칠 점이 보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퇴고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어느 날 갑자기 마감을 정했기 때문도 있겠지만(...) 글을 처음 쓴 시점에서 시간이 좀 지나서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글을 쓰고 몇 달이라도 인생을 더 살고 나면 그 사이에 깨닫는 것이 좀 생기는 것일까? 




  요즘 쓴 글 중에 이 글이 제일 별로인 것 같다. (기분 탓일까?) 나중에 보면 얼마나 개똥 같은 글일까? 벌써 퇴고할 날이(온다면) 기대된다. 퇴고를 한다고 완벽한 글이 탄생할 것이라는 기대는 버린 지 오래이지만.. 어쨌든 몇 개월 후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는 글을 잘 쓸 것이다. 나는 계속 글을 쓸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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